문정희 | 시인
새삼 위대한 문학은 상상력도 중요하지만 경험과 기억의 산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
전 생애를 통한 슬픔과 비극의 경험을 문학의 바탕으로 삼아 미국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여성 시인 마야 안젤루(1928~2014)가 미국 주화 25센트 동전에 새겨진다는 뉴스가 전해졌다. 여성이 주화나 지폐에 새겨지는 일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드문 일이다.
흑인으로 태어난 마야 안젤루는 일찍이 부모의 이혼으로 할머니 밑에서 자라며 보통사람이라면 한번도 당하기 힘든 참혹한 일들을 연거푸 겪으면서도 강한 자아로 삶을 되살린 여성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남자친구에게 성폭행당한 이후 삼촌들에게 가해남성이 살해되자 그 충격으로 몇년간 실어증에 빠져 침묵 속을 헤매는 고통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16살에 아들을 낳아 미혼모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생명을 다시 탄생시키고 또 탄생시켜 강하고 주체적인 여성, 상처받은 삶을 뛰어넘는 존재가 되었다.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에서 흑인 여성 최초로 시낭송을 할 때 그것을 보는 이들은 모두 감동 속에 숨을 죽였다. 좀 종교적인 표현 같지만 어떤 소개 글에서 마야 안젤루는 부활에 부활을 거듭한 삶을 산 인물이라는 표현을 했다.
10여년 전 중남미 최대 도서전인 멕시코 ‘과달라하라 도서전’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당신의 시는 어디로부터 온 것입니까?” 스페인어권 기자의 질문을 받고 나는 저고리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때 나는 평소 잘 입지 않는 한복을 입고 있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코리아의 시인에게 주목이 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대표 작가 카를로스 푸엔테스를 비롯하여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콜롬비아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남아프리카의 네이딘 고디머, 포르투갈의 조제 사라마구 등 금세기 노벨상을 받은 스페인어권 문학 거장들이 행사장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 21개국이 사용하고 있는 스페인어권의 기자가 나를 동아시아 한 변방 여성 시인쯤으로 볼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도 몰래 어떤 방어 태세를 취한 것 같기도 하다.
“자, 이 피를 뽑아보세요.” 나는 그 앞에 내 팔목을 내밀었다.
“나의 시는 내 고향의 흙과 바람, 어머니의 말, 그리고 많은 만남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중에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피와, 프리다 칼로의 눈물도 틀림없이 섞여 있을 것입니다.” 기자는 한국 여성 시인의 입에서 뜻밖에 피와 눈물이라는 말과 함께 스페인어권 여성 예술가들의 이름이 나오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미소와 함께 질문을 이었다.
“당신이 칠레의 여성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영향을 받았다니 참 반갑습니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는 너무 유명하지만….” 그는 지갑에서 지폐 한장을 꺼냈다. 칠레의 5000페소 지폐에 한 여성 시인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1889~1957). 중남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1945)한 여성 시인의 얼굴이 거기 있었다. 유명한 시인 파블로 네루다를 소년 시절에 만나 문학으로 이끈 스승이기도 하다. 젊은 날 사랑했던 남자의 자살로 인해 나락에 빠져 깊은 고통을 치렀고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산 그녀였다. 그 대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진실로 깊이 사랑하며 보냈다. 특히 어린이를 사랑하여 여러권의 동화책을 썼다. 시인, 외교관, 교육자로 누구보다 환경 개선에 먼저 눈을 뜬 그녀였다. “라틴 아메리카의 이상주의적 소망을 작가의 이름으로 대치할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하게 만든 강한 서정시”라고 노벨상위원회는 발표했었다.
유료 입장만 50만명이 넘고 600가지 행사가 있는 ‘과달라하라 도서전’이 끝나기 전날이었다. 현지 예술가들과 테킬라 마을로 가는 도중 주유소에서 누가 신문 몇장을 사들고 버스로 올라왔다.
축제 참가 작가인 한국 소설가 서정인의 ‘강’과, 나의 시 ‘편지’가 멕시코 언론 <엘 옥시덴탈>에 한국 문학의 경향과 특질과 함께 크게 소개되어 있었다. 한국문학번역원의 노력과 그 전날 내가 인터뷰에서 한복을 입고 스페인어권 예술가들을 언급한 것도 한몫을 한 것 같아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 뒤 칠레의 문학 행사에 초대되어 갔을 때였다. 나는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얼굴이 있는 5000페소(약 7500원) 지폐를 드디어 선물로 받았다. 미국 아이오와대 국제창작프로그램 친구인 소설가 하이메 콜리에르가 나를 만나자마자 지갑에서 여성 시인의 얼굴이 새겨진 그 지폐를 칠레 방문 기념으로 자랑스럽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군부 독재와 민주화를 향한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굳건한 문학의 나라 칠레에 대한 자부심이 넘치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에게 한국의 여성 소설가 박경리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노벨상 수상 50주년에 칠레 정부가 수여한 기념 메달을 받았다(1996)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나의 지갑에 신사임당이 새겨진 한국 지폐 5만원권이 있었다면 나는 그것을 하이메에게 선물로 주었을까?
조선시대 화가요, 문인인 신사임당(1504~1551) 역시 추앙받기에 충분한 인물이지만 사임당은 예술가보다 부덕과 현모양처 이미지로 더 크게 부각되는 인물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20년 전 조선 연산군 시대 명문가의 딸로 태어나 어진 아내로 아들 율곡을 키운 지혜로운 어머니인 것이다. 중국 고대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 태임을 최고의 여성상으로 꼽아 지었다는 ‘사임당’이 말해주듯이 전통적 여성상이다. 오늘날 역동적인 한국 여성의 꿈과 미래지향적 가치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그녀 자신의 강렬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사는 이 땅의 가치를 진전시킬 진정한 여성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우선 상처 입고 고통받는 여성을 향한 깊이 밴 편견과 비하 의식부터 걷어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미국의 쿼터 주화에는 앞으로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를 비롯하여 사회에 공헌이 큰 인물들이 차례로 등장할 예정이라 한다. 그 첫번째 주화에 등장한 마야 안젤루는 팔을 들고 멀리 내다보는 시인 이미지와, 강렬한 새가 태양광선 앞에 날아오르는 이미지로 명예와 불굴의 삶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쪽 면에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있고, 다른 한쪽 면에 흑인 여성 시인 마야 안젤루가 있는 미국의 새 주화는 상징성으로 보아 25센트가 아니라 “인간의 꿈과 희망”이라는 무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