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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멸공이라는 무지하고 비정한 의지

등록 2022-02-06 17:19수정 2022-02-07 09:48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지난해 11월15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게시물. 인스타그램 갈무리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이 지난해 11월15일 인스타그램에 올린 게시물. 인스타그램 갈무리

조해진 | 소설가

‘반공’이 우리를 키우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의무교육을 받던 1980년대만 해도 반공 포스터를 그리거나 반공을 다짐하는 글쓰기로 자주 숙제를 해야 했고 북한 군인들을 늑대로 표현한 만화는 명절 때마다 방송되곤 했다. 그 시절 반공은 반론이나 의문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거부의 마음으로 아이들의 성장하는 몸 안에 축적되어갔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실제 현실과 우리가 배워서 아는 것에는 늘 크고 작은 오차가 있다는 걸 말이다. 내게는 그 오차를 일깨워주는 것이 늘 문학이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읽은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역시 내 인식의 판 하나를 깨뜨린 작품이었는데, 오랫동안 기계적으로 수용했던 ‘반공’이 평범한 사람들의 수많은 희생 위에서 형성된 허술한 구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부터 1953년 휴전협정까지를 배경으로 한 <태백산맥>은 친북소설이 아니다.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작품도 아니다. 그저 신념이나 이념보다는 생존을 위해 죽고 죽여야 했던 그 시대 한국인의 이야기이다. 가족을 비롯한 사랑하는 이들의 비참한 죽음을 지켜본 적 있는 사람들에게 좌파니 우파니 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저 살아야 한다는, 살아서 원한을 갚겠다는 일념만이 작동했을 뿐이다.

최근 한 대기업 부회장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멸공’을 거론한 데 이어 대통령 후보 중 한명은 그 대기업이 운영하는 대형마트에서 멸치와 콩을 사진으로 찍어 공개하며 논란이 된 바 있다. 멸공은 반공과는 또 다른 질감의 단어다. ‘멸하다’는 단순한 반대와 적대가 아니라 없애서 그 싹마저 다시는 틔우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와 연결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멸하고 싶어 하는 공산주의의 정체는 무엇인가. 대기업 부회장은 ‘우리 위에 사는 애들’이라고 밝혔다. 대통령 후보 역시 ‘선제타격’의 가능성이 전쟁을 막는 것이라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모순된 발언을 하며 그 ‘애들’을 겨냥한다. 궁금해졌다. 북한을 어떻게 멸하겠다는 것인지, 혹 어떤 방법으로든 멸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멸공의 시간 동안 그 나라뿐 아니라 그 나라 아래에서 살고 있는 한명 한명의 안위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

박완서는 자전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서 전쟁을 겪은 자신의 삶을 돌아본 바 있다. 전후의 폐허에서 일단 입 하나를 해결해야 했던 시절을 ‘벌레의 시간’이라고 표현하는가 하면, 가족의 생존을 위해 미군 피엑스(PX)에서 돈벌이에 몰두하면서도 ‘양키에게 붙어먹고’ 사는 것의 남루함을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벌레’는 식량창고에서 쌀 한톨이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누군가를 짓밟아야 했던 사람들과 미군의 달러를 받기 위해 자의든 타의든 몸을 내주어야 했던 또 다른 누군가의 ‘벌레’에 비하면 덜 비참하다(노명우, <인생극장>, 사계절). 전쟁과 전후는 그런 것이다. 누구라도 벌레, 아니 그 이상의 비참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단순한 증오가 아닐 것이다. 전쟁과 전후의 폐허를 가능하게 했던 오판과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반성과 성찰을 이어가는 것이어야 할 테다. 그러니 멸공을 말하기 전에 그 단어에 깃든 비정함과 그 단어에서 빠진 역사를 제대로 보길 바란다. 지긋지긋한 이념 싸움과 전쟁에 대한 공포가 아닌 종전선언과 완전한 평화 위에서 새롭게 살아갈 다음 세대의 전망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우리는 벌레가 아니라 살아 있고 살 가치가 있는 인간이므로, 다시는 잘못된 역사를 반복할 생각이 절대적으로 전무한 ‘반공’ 이후의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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