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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손석춘칼럼] 활짝 핀 ‘악마의 꽃’

등록 2006-06-09 21:08수정 2018-05-11 16:32

손석춘 기획위원
손석춘 기획위원
손석춘칼럼
“그대 타오른 자리에/ 다시/ 악마의 꽃이 만개하고/ ….”

무명 시인의 노래다. 제목은 ‘진달래’. 1987년 작품이다. 무명시인이되 무명은 아니다. 시인으로 그럴 따름이다. 그 이름 석 자는 우리 청사에 눈부시다. 스물한 살에 삶을 마감한 젊은이, 이한열이다.

1966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다. 입시의 굴레를 벗어나 대학에 들어온 지 한 해 반도 지나지 않았다. 87년 6월9일. 군사독재가 미친 듯이 쏘아댄 최루탄이 쫓겨 가는 이한열의 뒷머리에 꽂혔다. 온몸이 뒤틀리던 이한열이 남긴 마지막 말은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든다. “내일 시청에 나가야 하는데 ….”

운명을 예감했을까. 참사를 당하기 전 친구에게 말했다. “세상이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려 해도 나는 결코 이 세상을 경멸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새 옹근 19년이 흘렀다. 6·10 항쟁의 그 날이 다시 밝았다. 세월은 본디 무심해서일까. 세상은 그를 죽인 데 이어 그를 버리고 있다. 보라. 저 악마의 꽃을. 이한열은 사월의 진달래를 짓밟은 군부독재를 악마의 꽃이라 불렀다. 이한열이 죽음으로 이룬 6월 대항쟁으로 그 꽃은 시드는 듯했다. 하지만 아니다. 군부 독재의 정당, 민정당을 밑절미로 한 한나라당이 만발하고 있다. 이한열의 원혼 앞에 참담한 까닭이다.

하지만 한숨만 쉴 때는 아니다. 눈시울 슴벅일 때는 더욱 아니다. 오늘 이 상황에 이른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내야 옳다. 먼저 분명히 묻자. 무지렁이들의 의식 수준 탓인가? 전혀 아니다. 민중은 김영삼은 물론,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을 대통령에 앉혔다. 그러나 어떤가. 파국을 맞은 김영삼은 논외로 하자. 김대중은 남북관계의 열매와 대조적으로 한국 경제를 신자유주의 체제에 예속시켰다. 신자유주의 확산을 틀거나 적어도 늦추리라 기대했던 노무현 정권은 되레 ‘앞잡이’가 되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보이는 저 놀라운 ‘집념’을 보라. 노 정권이 자유무역협정 추진에서 살천스레 드러내는 ‘저돌성’을 개혁정책에 돌렸다면, 상황은 어떨까. 설령 수구세력의 조직적 반대로 발목이 잡히더라도 민심의 지지를 받을 터다. 더 큰 문제는 선거에서 예고된 참패를 당했음에도 노 정권에 어떤 변화도 없는 데 있다. 민중의 서릿발 심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는 조짐도 보이지 않는다. 언죽번죽 아무 일도 아예 않겠다는 ‘배짱’마저 엿보인다.

명토박아 둔다. 노 정권의 임기는 아직 1년 반이 더 남았다. 민중의 심판에 겸손한 자세만 갖춘다면 꼭 늦은 것만은 아니다. ‘업적’을 남길 수 있다. 다시 민심을 얻을 수도 있다. 통일의 길을 조금이라도 앞당기든, 아니면 공약대로 노-사 사이에 힘의 균형을 모색하든, 남은 임기에 혼신의 힘을 다하려는 자세부터 갖출 때다.

하여, 노 정권의 ‘쇠귀’에 마지막으로 촉구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포기하라. 뜻만 있다면 얼마든지 모양 갖춰 물러설 수 있다. 비정규직 입법도 제대로 하라. 노사관계 ‘선진화’를 노사 대화로 풀어가라. 6·15 공동선언에서 한걸음이라도 나아가라. 마지막 촉구도 ‘경 읽기’로 흘릴 때, 심판은 벅벅이 더 가혹할 터이다.

무엇보다 노 정권의 아집 때문에 이 땅의 역사가 뒷걸음질할 수는 없다. 지금 이 순간도 고통받는 민중에게 ‘악마의 꽃’을 선사할 순 더욱 없다. 그렇다. 살아있는 모든 민주시민에겐 의무가 있다. 이한열, 그대 타오른 자리에 다시 악마의 꽃이 만개할 수 없다.

기획위원 2020gi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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