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순수와 참여. 한때 지식인을 가르는 기준이었다. 군부독재 시기, ‘순수문학’을 자부한 윤똑똑이들이 그랬다. 물론 그들의 생활은 순수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장 현실적인 사회과학인 경제학조차 그랬다. ‘순수경제학’이라는 가당치 않은 말이 퍼져 있었다. 군부독재가 물러나면서 순수와 참여라는 생게망게한 구분은 시나브로 사라졌다. 하지만 말의 혼란은 가시지 않았다. 이명박 정권의 총리로 등장한 정운찬 교수를 보자. 대다수 언론이 그를 ‘마당발’로 소개했다. 각계에 거미줄 인맥을 갖췄단다. 좌에서 우까지 폭넓게 포진했단다. 도통 이해하기 어렵다. 모든 이에게 좋게 평가받는 사람을 경계한 공자는 접어두자. 교수, 특히 사회과학자가 좌에서 우까지 마당발이 가능한가? 더 말살에 쇠살은 마당발 교수의 ‘참여론’이다. 교수 정운찬은 평소 ‘책상머리’보다 ‘현실참여’를 강조했단다. 물론 경제학자가 ‘순수경제학’을 고집하지 않고 ‘참여’를 고심한다면 대견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이 순수이고 무엇이 참여인가에 있다. 누구도 특정 사회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가령 순수문학이나 순수경제학 또한 특정한 참여다. 정운찬은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30년 넘게 강의했다. 총장까지 지냈다. 그 격동의 세월 내내 그는 과연 어느 곳에 참여했을까?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물론, 친민주당 지식인들까지 그를 높이 평가할 때마다 나는 참 궁금했다. 대체 정운찬은 무엇을 해왔을까. 굳이 해직 교수들과 그를 비교할 생각은 없다. 삶의 대부분을 대학 밖에서 경제학자로 걸어간 고 박현채와 견주기란 더 그렇다. 이미 서울대는 김수행 교수의 정년퇴임으로 진보적 경제학의 씨가 말랐다. 학생들 요구는 묵살당했다. 명토박아 둔다. 교수의 현실 참여는 총리를 비롯한 ‘권력의 자리’에 나가야 가능한 게 아니다. 참여는 자신이 몸담은 대학 현장에서 시작해야 옳다. 가령 박정희가 민주주의를 압살하던 시기에 몇몇 교수들은 학생 속으로 들어가 토론하며 그들을 지식인으로 키워갔다. 그 시기 대학이 민주주의의 진지였던 까닭도 학생들과 더불어 호흡하는 몇몇 교수의 열정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요즘은 어떤가. 그런 교수가 아예 없는 대학이 많고 있더라도 극소수다. 언제부터인가 교수의 현실 참여는 학생들과 무관하게 이뤄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그나마 개혁적 교수들이 학교 밖 활동에 분주하면서 대학의 보수화 또는 수구화가 더 짙어갔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친화적인 교수가 80%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다. 흔히 대학생 보수화를 들먹인다. 그런데 교수가 무람없이 그런 진단을 내리거나 그 책임을 학생들에게 돌리는 모습은 민망하다. 묻고 싶다. 대학생 보수화를 개탄하는 교수들은 과연 얼마나 학생들에게 다가갔을까. 학생 속으로 들어가 학습 동아리를 만들며 그들이 처한 현실을 어떻게 넘어설까를 더불어 모색해가는 지성인이 오늘의 대학에 얼마나 될까. 보수 또는 수구가 절대다수인 교수 사회, 그나마 일부인 ‘참여 교수’들은 밖으로 나도는 강단 현실이 20대의 좌절을 무장 깊게 해온 중요한 이유는 아닐까. 바로 그 맥락에서 정운찬 교수의 현실 참여론은 소가 웃을 일이다. 신자유주의를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부라퀴들이 활개 치는 한국 경제계에서 그가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지금도 곳곳에 나 있다. 현실 참여를 언죽번죽 부르대며 시장만능주의 정권의 총리로 들어가는 그의 ‘지성’이 천박하게 다가오는 까닭이다. 그렇다. 이명박 정권의 총리로 나선 정운찬의 ‘결단’은 결코 참여가 아니다. 그렇다면 순수일까. 더욱 아니다. 손석춘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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