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장
손석춘칼럼
이 땅에 희망은 있는가. 새해 첫날 아침, 조용히 묻는다. 이 나라 골골샅샅에서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고통이 무장 커져가고 있어서다.
미국의 탐욕스런 금융자본을 숙주로 출현한 공황의 악령은 지구촌으로 퍼져가며 이 땅의 민중에게도 음산하게 다가오고 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권은 그 악령을 ‘천사’로 믿으며 신자유주의 외길로 미친 듯이 달려간다.
그래서다. 언제나 그렇듯이 희망의 근거는 고통받는 민중일 수밖에 없다. 부자정권-부자신문과 이해관계가 볼맞는 이들은 굳이 ‘희망’을 떠올릴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살천스러움과 정반대로 고통에 잠긴 민중은 얼마나 다사로운가.
물론, ‘민중’이란 말에 들씌운 편견을 모르지 않는다. 방귀깨나 뀌는 자들에게 민중이란 말이 여전히 불편하거나 불온해서가 아니다. 진보적 지식인 가운데도 ‘민중’을 낡은 시대의 표상쯤으로 여기는 이들이 시나브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라. 세계경제 위기 속에서 민중은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찬찬히 톺아볼 일이다. 신자유주의로 고통 받는 노동자·농민·빈민·영세 자영업인을 아우를 말이 또 있는가. ‘민중’이 가장 적실한 호명 아닌가. 다름 아닌 우리가 민중 아닌가.
민중이란 말의 죽음은 오랜 세월 그 말을 사갈시했던 부자신문이 여론시장을 독과점해온 데서 비롯한다. 그래서다. 그 말은 아직 온새미로 부활하진 않았다. 하지만 살에 피가 도는 민중은 일어서고 있다. 역설이지만 공황의 악령이 민중을 불러오고 있다.
민중만 살아나고 있지 않다. 자본주의를 날카롭게 분석한 마르크스도 부활하고 있다. 지구 곳곳에서 마르크스에 곰비임비 귀 기울이는 까닭도 여기 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진에 ‘식민지근대화론’ 따위의 ‘뉴라이트’가 화장걸음 걷고, 마르크스 경제학은 명맥이 끊긴 상황은 이 땅의 퇴행일 뿐이다.
물론, 19세기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 곧장 21세기 오늘의 대안일 수는 없다. 마르크스가 언제나 강조한 새로운 사회의 희망을 유념해야 할 까닭이다. 마르크스는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을 결코 노동자들에 두지 않았다. 정확히 마르크스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가 새로운 사회를 구현할 때 전적으로 기댔던 희망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지적 발전’이었다. 여기서 ‘지적 발전’은 가방끈의 학력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 인식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인 오늘, 마르크스 사상의 지적 발전 또한 절실하다. 신자유주의로 빚어진 고통은 비단 노동자들만의 짐이 아니다. 농민은 물론, 영세 자영업인과 빈민, 실업자, 갈수록 미래가 어두운 청년 학생들을 포함해야 옳다. 더구나 이 땅에서 민중의 꼭뒤를 짓누르는 자는 신자유주의가 부른 악령만이 아니다. 분단체제 또한 남과 북의 질곡이다.
바로 그렇기에 민중의 지적 발전은 더 절실하다. 지적 발전에 밑절미를 둔 실천과 행동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다.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지적 발전, 바로 그곳에 희망이 있다. 희망을 찾는 게 아니라, 만들어야 할 이유다.
우리 자신부터 신자유주의의 대안이 무엇인가를, 분단체제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를, 지며리 학습하고 동시대인과 그 희망을 벅벅이 나눠야 옳다. 자신도 책임질 수 없는 버거운 ‘이상’을 완고하게 고집할 때가 아니다. 실사구시의 자세로 현실에 다가서는 게 먼저다. 이상은 싸목싸목 구현해 가도 충분하다. 아니 그게 슬기로운 자세다.
주권자인 민중의 슬기로 희망 만들기, 어두운 새해의 화두다.
손석춘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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