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규현 신부님을 만났다. 시장 안 허름한 막걸릿집에서는 처음이다. 짧게 자른 머리카락에는 흰 눈이 쌓이고 있었다. 볼의 주름이 깊었지만 눈은 여전히 초롱초롱한 아이. 몇해 전 스페인 다녀온 이야기를 하셨다. 파울루 코엘류의 <순례자>로 더욱 이름 높아진 산티아고 순례길이 사실 별거 아니잖아요. 우리도 우리 땅을 한번 걸어봅시다. 순간 ‘낚였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2009년에 여러 종교인들이 자치단체와 힘을 합쳐 전북 지역에 ‘아름다운 순례길’을 만들었다. 전주와 완주, 익산, 김제에 걸쳐 있는 9개 코스를 모두 합치면 240㎞에 이른다. 특정 종교의 성지를 연결하는 길이 아니라 종교 간 경계를 넘어 소통과 상생을 추구하자는 길이다.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그 길에 시인들이 함께했으면 좋겠어요. 안 선생은 9개 모든 코스를 같이 걸어요! 생각해볼 틈이 없었다. 아, 그때부터 나는 제대로 ‘낚여’ 버렸다. 밥 먹고 나서 아파트 주변 한 바퀴도 걷지 않는 내가 말이다.
오는 6월2일, 전주 한옥마을에서 완주 송광사까지 1코스 걷기가 시작된다. 험난한 산길도 아니고 바삐 뛰어가야 하는 길도 아니다. 힘들면 쉬어 가고, 이탈하면 스스로 길이 되어 가면 되니까. 같이 걷고 싶으면 아름다운 순례길 누리집(홈페이지)을 찾아 신청하면 된다.
나도 속셈이 없는 건 아니다. 이번 기회에 터질 것 같은 뱃살을 빼고 빈한한 시인의 몸매를 회복하는 게 목표다. 하체도 튼실해지겠지. 우선 운동화부터 새로 장만해야겠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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