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이라는 말은 고색창연하다. 비슷한 말로 ‘우인’이나 ‘동무’가 있지만 ‘우인’은 결혼식 같은 예식에서나 겨우 듣게 되었고, ‘동무’는 이데올로기 대립 과정에서 거의 죽은 말이 되었다. 지금은 ‘친구’가 폭넓게 쓰이지만 아쉽게도 한자어다. 옛 책에는 ‘벋’이라는 표기가 자주 나타나는데 바로 ‘벗’을 가리키는 말이다. 관계가 확대되어 벋어나간다는 의미, 혹은 가까이 손을 벋을 수 있는 사이라는 뜻이다. 조선 후기 이덕무의 문장을 뽑아 번역한 <한서 이불과 논어 병풍>(열림원)에 벗에 관해 음미할 만한 구절이 나온다. 정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이 생긴다면 나도 이렇게 하고 싶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씩 물들인다면, 50일 만에 다섯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벗을 위해 적어도 11년에다 50일 더한 시간을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멋지지 아니한가?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펼쳐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오, 그 상대가 벗이 아니라면 이런 호탕한 꿈을 어디에다 발설할까.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