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준비할 때 나는 동학과 관련된 시를 모으는 일을 맡았다. 1000명 가까운 시인들에게 원고청탁서를 보냈고, 근대 이후 출간된 어지간한 시집을 다 뒤졌다. 그렇게 해서 90여편을 묶어 시집을 낸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 시인들은 1894년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을 의외로 외면하고 있었다. 인하대 최원식 교수는 그 원인을 일제의 혹독한 검열과 한국 근대문학의 이식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조운(曺雲)의 시조 ‘고부 두성산’을 찾아낸 것은 행운이었다. “두성산 이언마는 녹두집이 그 어덴고/ 뒤염진 늙은이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배트소롬하고 묻는 나만 보누나// 솔잎 댓잎 푸릇푸릇 봄철만 여기고서/ 일나서 패했다고 설거운 노라마라/ 오늘은 백만농군이 죄다 봉준이로다” 이 시조는 1947년 조선문학가동맹에서 펴낸 <연간조선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동학 관련 최초의 시라는 점 이외에 ‘봉준이’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혁명을 주도한 인물에 대한 친근성과 연대의식이 작용한 것. 조운은 1900년 전남 영광에서 출생했고, 영광·장성·고창·정읍 등지에서 문화운동과 교육운동에 참여했다. 1924년 <조선문단>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해서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고 1949년 가족과 함께 월북했다. 그의 빼어난 시 ‘석류’를 읽어보라. “투박한 나의 얼굴/ 두툴한 나의 입술/ 알알이 붉은 뜻을/ 내가 어이 이르리까/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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