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한 화가가 있었다. 그는 화실에서 검은 두건을 쓰고 흰 겹옷을 입고 초록 붓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바다에 떼를 지어 노니는 물고기 그림을 감상하는 중이었다. 때는 가을날이었다. 그때 홀연 문종이 바른 창에 햇빛이 비쳐 환해지더니 기울어진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드리워졌다. 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는 단번에 붓에다 묽은 먹을 묻혔다. 그러고는 문종이를 바른 창으로 바짝 다가갔다. 창에 드리워진 국화꽃 그림자를 모사하기 시작했다. 국화 줄기와 잎과 꽃을 하나하나 베끼고 났더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한 쌍의 큰 나비가 향기를 쫓아와서는 국화꽃 가운데 와 앉는 게 보였다. 나비의 더듬이가 마치 구리줄같이 또렷해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 역시 창에 드리워진 그림자였다. 그는 그것마저 세밀하게 그려 넣었다. 나비가 앉은 국화꽃 그림이 완성된 것이다. 그러고 나니 또 문득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가지를 잡고 매달리기에 참으로 기이하게 생각되었다. 국화꽃 여린 가지를 붙잡고 있는 참새가 놀라서 곧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는 참새의 형상을 급히 또 베껴 그렸다. 그때야 그는 붓을 내던지며 이렇게 말했다. “일을 잘 마쳤다. 나비를 얻었는데 참새를 또 얻었구나!”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 화가가 문종이에 그린 그림은 과연 표절일까, 창작일까? 이덕무의 문장을 몇 글자만 바꿔 그대로 옮겨 적은 이 글은 그럼 또 무엇일까?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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