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무에 맛이 들 때다. 밭에서 하나를 뽑아 낫으로 쓱쓱 깎아 먹어도 좋겠다. 채로 썬 무를 들기름에 볶아서 푹 끓인 뭇국으로 해장을 해도 좋겠고. 무는 칼로 써는 방법에 따라 전혀 다른 반찬으로 변신한다. 깍둑썰기를 하면 깍두기가 되고, 나박나박 썰면 나박김치가 되고, 채로 총총 썰어 무치면 무생채가 된다.
이맘때면 외할머니는 볕 좋은 마루에 앉아 무를 썰어 말렸다. 무를 채반에 말리는 풍경은 눈부셨다. 납작한 무가 내뿜는 빛이 강렬해서 마치 신성한 제사의 의식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외할머니가 살점을 납작납작하게 썰어 말리고 있다/ 내 입에 넣어 씹어 먹기 좋을 만큼 가지런해서 슬프다/ 가을볕이 살점 위에 감미료를 편편 뿌리고 있다// 몸에 남은 물기를 꼭 짜버리고/ 이레 만에 외할머니는 꼬들꼬들해졌다// 그해 가을 나는 외갓집고방에서 귀뚜라미가 되어 글썽글썽 울었다”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생각하며 쓴 ‘무말랭이’라는 시다. 어릴 적에 나는 무말랭이보다 입으로 ‘곤짠지’를 먼저 익혔다. 경북 북부지방의 방언이다. 대구에서는 특이하게 ‘오그락지’라고 부른다. 무가 말라 오그라들었다는 말이다. 무말랭이를 만들 때는 김장김치를 담그고 나서 남은 양념을 쓰기도 하는데, 엿물과 검은 참깨를 거기에 더한다. 고춧잎을 섞어 만든 무말랭이도 맛이 각별하다. 겨울철에 두고두고 먹을 수 있어 달달하고 매운 맛이 친근했지만 지겨울 때도 있었다. 이듬해 봄이 지날 때까지 도시락 반찬에 빠지지 않았으니까.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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