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전주감영을 접수하고 집강소를 설치한 동학농민군은 고향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있었다. 이때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고 있었다. 나라의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전봉준은 직속 부대 4천명을 이끌고 전북 완주의 삼례로 갔다. 일본과의 일전을 치르기 위해서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외세와 싸우는 전쟁의 성격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바로 삼례 2차 봉기다. 삼례는 전주 북쪽의 만경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었는데, 서울로 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전봉준은 전주성에서 총 251자루, 탄환 9700개, 화포 74문을 조달했다. 지방 관리들은 못 이긴 척 무기고의 열쇠를 내주었다. 늦가을에 삼례에 모인 농민군의 수는 10만명을 웃돌았다. 그 기세가 강물도 출렁이게 만들었다.
내가 일하는 학교가 삼례에 있다. 삼례터미널 앞길은 ‘동학농민길’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옛날 1번 국도가 지나는 길이다. 나는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농민군의 발자취를 생각해본다. 120년 전 전국 곳곳에서 짚신을 신고 모여들었을 사람들의 눈빛과 이 작은 고장에 감돌았을 혁명의 기운을 상상한다. 그이들은 어떤 국밥집에서 밥을 먹었을까, 버선 대신 헝겊을 감아 감발을 했다는데 발은 시리지 않았을까. 농민군들은 삼례에 집결했으나 곧바로 서울로 진격하지 못했다. 최시형, 손병희가 이끄는 북접이 주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달 동안 농민군은 매운 강바람을 견디며 삼례에서 기다려야 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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