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군정을 총괄하는 도체찰사를 맡았고, 후에 영의정까지 오르게 된다. 이순신과 권율 장군을 발탁해 7년간의 지루한 전쟁을 결국 승리로 이끈 주역이다. 이순신보다 세 살이 많은 그는 이순신의 기용에 반대한 세력에 밀려 몇 차례 벼슬자리를 박탈당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어리숙하고 겁이 많은 선조는 왕궁을 버리고 명나라로 내뺄 궁리를 하고 있었다. 백성을 놔두고 피신하려는 선조에게 류성룡은 따끔하게 충고한다. “임금의 수레가 국토 밖으로 한 발짝만 떠나면 조선은 우리 땅이 되지 않습니다.” 류성룡의 설득으로 선조는 의주까지 피난을 갔지만 압록강을 건너지 못했다. 류성룡은 귀가 얇은 왕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기에 전쟁 중에 파직을 당하게 된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바로 그날이었다. 류성룡은 미련 없이 서울을 떠난다. 고향인 안동 하회마을로 돌아온 그는 강 건너 옥연정사에서 <징비록> 집필을 마무리한다.
하회마을은 많은 이들이 잘 알고 있지만 류성룡이 말년을 보낸 초막을 아는 이들은 드물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가 바로 그곳. 학가산 자락의 중대바위 아래 산골짜기 마을이다. 한 시대를 이끌었던 류성룡은 하회마을의 기와집을 버리고 산골로 들어간다. 그때 그의 마음은 이랬을 것이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백석) 권력에 빌붙어 사는 자들에게 읽어주고 싶은 시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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