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대학 시절을 생각하면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따라나오는 기억들이 있다. 아버지가 우체국 소액환으로 보내준 생활비를 술값으로 날려버리고 가게 아줌마한테 외상 달아놓던 일, 아카시아 향이 짙던 5월 어느 날 저녁에 계엄군한테 얻어맞고 빨간약 발라대던 일, 연탄불에 라면을 끓이다가 심심찮게 폭삭 엎어버리고 말던 일, 일 년에 한 번꼴로 이불 보따리에 책 몇 권 싣고 옮겨다니던 자취집들, 그 시원찮은 빨래들이며 하이타이 냄새…….
매년 12월 크리스마스 부근에는 아픔도 없이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아팠다. 신춘문예 때문이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당선 통지가 오지 않았던 것. 벽에다 버젓이 당선소감까지 써서 붙여두었는데 전보를 가지고 와야 할 우편배달부는 대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낙선의 겨울은 쓰라렸고, 하릴없이 내리는 눈발을 향해 삿대질을 해댔다. 게다가 이미 당선 통보를 받은 선배나 친구들이 희희낙락하는 꼴은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새해 첫날 신문에 실린 당선작들을 보려고 아침마다 신문 가판대를 기웃거리고는 했다.
문학지망생들의 12월은 열병을 앓는 계절이다. 몇 해 전부터는 코를 빠뜨리고 있는 제자들을 불러 모아 술을 사주는 일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이름하여 낙선축하주.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기다리는 게 삶이지. 끝이 시작이잖아. 운이 없었던 거야. 내년엔 꼭 될 거야. 자, 다들 힘을 내. 어깨를 두드리며 술잔 채워주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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