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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도현의 발견] 타버린 잔

등록 2014-01-01 19:15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조용필의 히트곡 중에 ‘바람이 전하는 말’이라는 노래가 있다. “내 영혼이 떠나간 뒤에 행복한 너는 나를 잊었고 어느 순간 홀로인 듯한 쓸쓸함이 찾아올 거야.” 죽음과도 같은 이별 뒤에 연인의 가슴속에 찾아오게 될 공허함을 다독이는 노래의 마지막은 이렇다. “착한 당신 속상해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조용필 특유의 호소력 있는 목소리에 실려 이 노래가 라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면 괜히 가슴에 금이 쩡 가곤 했다. 20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하도 많이 들어서 가사를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는데 어느 날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가사 2절의 한 부분 때문이다. “타버린 그 재 속에 숨어 있는 불씨의 추억.”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더니 내가 귀로 들어 익숙한 그 가사가 아니었다. 나는 수십년간 “타버린 그 잔 속에 숨어 있는 불씨의 추억”으로 알고 있었던 것! 조용필은 노래의 절정 부분에서 강한 된소리를 많이 쓰는 가수다. “타버린 그 재 속에”를 나는 어처구니없이 “타버린 그 잔 속에”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듣기 능력의 오류를 눈으로 확인했음에도 마음 한쪽이 못내 찜찜하였다. 연인들이 나누던 술잔이 이별 뒤엔 다시 그럴 일이 없으니 타버린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그게 더 시적이면서 절절하지 않은가? 타버린 재 속에 불씨가 남는다는 건 너무 식상한 표현이 아닌가? 나는 끝내 우기고 싶었다. 나 혼자만의 상상력과 은유는 별것 아닌 사실 앞에 무너지고 거세되고 만 것이다. 상심이 큰 날이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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