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마음으로 모시는 어르신이 있다. 서울대 중어중문학과에서 정년을 마친 이병한 선생님. 나는 선생님이 엮은 <중국고전시학의 이해>(문학과지성사)를 오래전에 읽었다. 옛 시인들이 선대의 전통을 어떻게 잇고 매듭짓는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어 지금도 펼쳐보는 책이다. <치자꽃 향기 코끝을 스치더니>와 <이태백이 없으니 누구에게 술을 판다?>(민음사)는 한시에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시에 접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학교에서 동료들과 틈틈이 한시를 읽고 묶은 책인데, 황동규 선생님도 이 모임의 ‘학동’ 중 한 분이었다.
전북 완주에서 텃밭을 가꾸며 산을 돌보기도 하시더니 서울에서 내려오는 일이 뜸하시다. 연세 때문은 아닐 것이다. 여든을 넘긴 선생님이 어떤 글에서 짓궂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매년 설을 쇨 때마다 당신은 나이를 한 살씩 줄여 셈할 생각이라고. 그걸 요즈음 실행에 옮기시는 중일까? 가끔 동시를 써서 내게 보여주시는 것이다. 백발의 할아버지가 동시를 만지작거리고 계시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싱그럽다.
최근에 선생님이 좀 언짢아하실 일이 생겼다. 후배뻘 되는 어느 교수 한 분이 선생님의 글을 거의 베끼다시피 자신의 책에 옮겨다 쓴 것. 20년 전에 펴낸 선생님의 책에서 안평대군과 관련된 번역과 해설을 그대로 표절해 썼다고 한다. 속이 상하실 만하다. 최소한 인용한 글의 출처라도 밝혔어야 했다. 나날이 젊어지는 선생님을 세속의 일로 괴롭히면 안 된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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