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한철 제주에서 ‘폭낭’이라 부르는 팽나무를 실컷 바라보았다. 나는 옮겨 심은 팽나무보다는 마을 어귀나 밭둑, 혹은 돌담에 기대어 저절로 자라는 팽나무를 더 좋아한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시달린, 나이 많이 잡수신 팽나무를 만나러 이곳저곳을 일없이 돌아다녔다. 기품 있는 팽나무 어르신 앞에서는 삶을 한 수 배우는 것 같아 고개가 숙여졌다.
팽나무에 빠져 있는 나를 보고 조랑조랑 웃고 있는 나무가 있었다. 제주도 어디를 가도 볼 수 있는 흔한 나무였다. 마을 노인 한 분께 여쭈었더니 ‘머쿠슬낭’이라 한다. 아, 가까이에 두고도 지나치기만 했던 나의 속됨과 무식함이여! 그 나무는 바로 남해안과 제주도에 자생한다는 멀구슬나무였다. ‘말구슬나무’라고도 하는데 한자로는 ‘마주목’(馬珠木)이다. 여름에 이 나무 그늘에 앉아 있으면 모기가 달려들지 않는다고 노인은 설명을 보태주셨다. 살충 성분이 나무의 몸속 어딘가에 있는 모양이다.
멀구슬나무가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낼 때가 바로 겨울철이다. 서로 사이좋게 소곤소곤 이야기하듯이, 톡 건드려주면 소리도 낼 수 있다는 듯이, 아직 떨어지지 않고 포도송이같이 조랑조랑 매달려 있는 동그란 열매들. 어린아이들이 새총의 총알로 쓰기도 했다는 멀구슬나무 열매는 겨울에도 지지 않는 꽃이다. 바짝 다가가서 나무하고 눈을 맞추고 봐야 하는 꽃이다. 겨울에는 멀구슬나무 열매를 보러 제주에 가고, 6월에는 그 연보라색 꽃을 보러 제주로 가자.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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