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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도현의 발견] 보리밟기

등록 2014-02-23 18:47수정 2014-02-23 20:49

얼음이 녹는다는 우수가 지났다. 황량한 들판에 봄을 제일 먼저 끌고 오는 것은 보리밭이다. 이것 좀 보라고, 보리밭은 땅속에 숨겨두었던 새싹들을 펼쳐 보인다. 멀리서 봐도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허공을 꽁꽁 동여매고 있던 추위를 파릇한 싹으로 찔러 녹이고, 허공의 주인이 되기 위해 보리는 키를 돋아 세운다.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들이 꼼지락거리고 있기 때문에 보리밭 전체가 꿈틀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성급하게 고개를 내민 보리 싹은 밟아주어야 한다. 날이 풀리면 얼었던 흙이 들뜨게 되고 보리 싹이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1970년대를 통과한 이들은 보리밭 꽤나 밟아보았을 것이다. 보리 증산을 위해 당시 정부는 보리밟기 운동을 적극 장려하고 나섰다. 공무원과 일반 시민들이 일손을 놓고 보리밭으로 나섰다. 군인과 학생들도 수백명씩 보리밭으로 동원되었다. 한 줄로 줄을 맞추고 어깨를 끼고 꼭꼭 눌러 밟았다. 넓은 들이라고 해서 함부로 뛰어놀다가는 선생님께 한 대 쥐어박혔고.

봄에 파릇파릇한 풀을 밟으며 걷는 것을 답청(踏靑)이라 한다. “풀을 밟아라/ 들녘에 매 맞은 풀/ 맞을수록 시퍼런/ 봄이 온다/ 봄이 와도 우리가 이룰 수 없어/ 봄은 스스로 풀밭을 이루었다/ 이 나라의 어두운 아희들아/ 풀을 밟아라/ 밟으면 밟을수록 푸른/ 풀을 밟아라” 정희성 시인이 1974년에 낸 시집 <답청>에는 어두운 시대를 인내하던 선비의 목소리가 배어 있었다. 봄이 와도 세상은 어둡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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