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아파트 베란다에서 진달래가 꽃을 피웠다. 열흘쯤 된다. 지난해 가을에 우리 집에 이사 온 아가씨인데 처음으로 꽃을 피웠다. 겨우내 감추어두었던 봄을 누구보다 일찍 보여줘서 반갑고 고맙다. 덕분에 베란다가 환해져서 평수가 몇 배나 넓어진 것 같다. 어릴 적에 우리는 진달래보다 ‘참꽃’으로 더 많이 불렀다. 참꽃은 먹어도 되지만 ‘개꽃’으로 부르는 철쭉은 먹을 수 없다고 배웠다.
빨래들이 널린 베란다를 환하게 밝혀주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 아가씨 가만 보니 참 게으르기 짝이 없다. 하루종일 햇볕하고만 어울려 논다. 나를 통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샘이 나서 불쑥 입을 맞춰본 적도 있다. 하지만 몸을 부르르 떨다가 또 나를 외면한다. 아침인데도 이불을 개거나 머리를 빗거나 밥을 차려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외출한 뒤에도 햇볕하고만 눈을 맞추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요즘 이 참꽃에 빠져 있지만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읽었던 수필의 한 대목이 자꾸 머리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집 안에서 키우는 진달래가 꽃을 피워 반가웠는데, 딱 한 해만 꽃을 피우고 그다음 해부터는 영 소식이 없더라는 것이다. 차가운 바람과 눈이 덮어주는 이불을 덮고 자라지 않은 탓에 그만 생식능력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과보호가 불러일으킨 화였다.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하지? 바람 불고 비 오고 눈 내리는 베란다 밖으로 이 참꽃아가씨를 자주 데리고 나가야 하나? 원래 살던 산속으로 다시 보내야 하나?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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