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살 되신 어르신을 만나러 경남 통영을 다녀왔다. 제옥례 할머니는 경성사범을 졸업하고 수녀가 되어 황해도에서 교사 생활을 했다. 건강이 나빠져 귀향한 할머니는 통영에서 ‘박부잣집’으로 부르는 ‘하동집’ 주인 박희영과 8남매의 새어머니로 결혼한다. 당시 천주교에서도 이를 허락했다. 그 후 둘을 더 낳아 모두 10남매를 잘 키웠다. ‘하동집’은 당대 최고의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다. 유치환, 전혁림, 윤이상, 김춘수 등이 자주 들락거렸다. 박경리의 소설에 나오는 하동집이 바로 이 집이다. 늘그막에 수필을 쓰면서 예총 지부장도 맡고, 통영통제사 음식을 발굴해 재현하기도 했다.
시인 백석이 흠모하던 통영 처녀 박경련이 제옥례 할머니의 사촌 시누이다. ‘란’이라고 부르던 박경련을 백석으로부터 가로챈 것은 친구 신현중이었다. 신현중은 경성제대 반제동맹 사건의 주모자였는데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다가 통영으로 낙향해서 평생을 살았다. 60년대 초반에는 군복 벗은 박정희를 지지하는 글을 쓰기도 했고, 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장으로 일했다. 제옥례 할머니에 따르면 박경련은 폐결핵을 앓았고 몸이 약해 자식을 두지 못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박경련이 젊을 때 찍은 사진 한 장을 보여주셨다. 백석이 짝사랑한 그녀는 갸름하고 핼쑥한 얼굴에다 얌전한 눈매, 가르마 탄 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난 뒤에 시 한 편을 써서 제옥례 할머니에게 보여주었고, 할머니는 동인지 ‘늘빛문학’에 실어주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