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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안도현의 발견] 산수유

등록 2014-03-17 18:37

산수유라는 나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국어 교과서에 김종길의 ‘성탄제’가 실려 있었다. “서러운 서른 살 나의 이마에/ 불현듯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을 느끼는 것은,/ 눈 속에 따오신 산수유 붉은 알알이/ 아직도 내 혈액 속에 녹아 흐르는 까닭일까.” 흰 눈과 붉은 열매의 선명한 대비는 어린 나를 매혹시켰고, 그때 산수유라는 명사는 내게 깊이 각인되었다. 머리도 굵어져 산수유와 소월의 ‘산유화’를 구별할 줄은 알게 되었다.

산수유 꽃을 봄이 올 때마다 기다리게 된 것은 서른이 넘어서였다. 전남 구례 산동면을 찾아가 대낮부터 산수유 꽃 그늘에 몸을 맡기고 싶은 때가 많았다. 이 마을 처녀들 중에는 겨우내 산수유 열매를 치아로 벗겨내느라 이가 붉게 물든 이가 많았다는 말도 들었다. 그걸 ‘홍니’라고 부른다는 것도. 한국전쟁 전후 지리산에 서린 ‘산사람’들의 이야기와 홍니의 처녀들을 겹쳐보기도 했다.

이윽고 마흔을 넘겨서야 산수유를 눈에 바짝 대고 볼 수 있었다. “노란 물감을 풀어놓은 듯하다”는 비유는 망원경으로 산수유를 바라본 자의 게으른 문장이라고 무시했다. 우산 모양으로 펼쳐진 꽃대 끝마디에 꽃이 하나씩 조롱조롱 달린 것을 보았다. 일본식 용어로는 산형화서(傘形花序), 즉 산형꽃차례로 꽃자루 끝에 달린 4장의 꽃잎들은 하나같이 발랑 까져 있었다. 암술은 한 개, 수술은 네 개였다. 산수유 꽃을 본다는 것, 그것은 바야흐로 활기를 띠는 산수유의 사생활을 염탐한다는 것.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트위터 @ahndh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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