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놋그릇이나 놋숟가락이 귀한 시절이 있었다. 값싼 양은이나 스테인리스가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기(鍮器) 제품은 집안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았다. 손으로 일일이 두드려 만든 유기는 방짜유기라고 해서 지금도 높은 가격에 거래된다. 우리 밥상에는 방짜유기가 제격이다. 놋그릇은 깨진 기왓장을 잘게 빻은 가루를 묻혀 짚수세미로 쓱쓱 닦았다. 잔치나 제사를 앞두고는 놋그릇을 닦는 일에 온 집안사람들이 달라붙었다. 하얀 광목천으로 마른행주질을 하면 놋그릇의 표면에 거무튀튀한 이끼처럼 끼었던 녹이 어디로 가버리고 햇살 아래 찬연한 광채가 빛나곤 했다. 그럴 때면 햇살이 놋수저에서 튕겨 나와 내 눈썹 사이를 만지작거리는 것 같았다. 놋숟가락은 나 같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놀 수 없었다. 동그란 수저에 얼굴을 비춰보는 것으로 우리는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그 귀한 놋숟가락이 어떤 사연으로 누룽지를 긁는 데 사용하는 허드레 물건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윗대로부터 대대로 써내려오다가 숟가락으로 더 이상 역할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질 즈음에 가마솥 바닥의 누룽지를 득득 긁는 데 사용되었을 것이다. 무나 감자 껍질을 벗길 때에도 한 귀퉁이가 닳은 놋숟가락만 한 게 없었다. 붕어 같은 물고기 배를 딸 때도 요긴하게 쓰였다. 게다가 놋숟가락은 살균효과가 탁월하고 독성 있는 음식에 닿으면 까맣게 변해버린다고 한다. 이 총명하고 아름다운 놋숟가락을 본 지 오래되었다. 그것은 손잡이가 달린 예쁜 반달이었다.
안도현 시인·우석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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