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술을 항상 ‘사회적 영매’라고 말해왔다. 감성적 접신을 통해 항상 사회를 치유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아직도 미술은 쓸모가 있어 보인다. 태초에 말씀(언어와 문학)보다 먼저 있었던 알타미라 동굴벽화부터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두 정상의 선언을 내려다보는 그림들에 이르기까지 그림은 우리 옆에서 펄펄하게 살아갈 것이다. 평화의집에서 나오면서 누군가는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림이 멀리 있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
화가·416재단 이사장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때가 연일 계속되는 폭염 속이었다. 지구의 존망이 걱정되는 이 폭염 속에서 한가로이 무슨 그림의 팔자타령인가? 세상이 끝난다고 하더라도 두 달에 한 번꼴로 돌아온다는 이 칼럼에서 화가로서 쓸 거리는 내가 걸어오고 남은 날까지 껴안고 갈 미술, 즉 그림 이야기 외에 무엇이 더 있겠는가? 그럼 그림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작가의) 망상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세계를 물질(안료)로 대체하는 일이다. 단순히 물질로 덮여 있는 그림인데도 전시장에 갖다 놓으면 대중들에겐 어려워지기 마련인 모양이다. 아마도 전시장이 일종의 제의 공간이기 때문이리라. 대개가 전시장에 오라고 하면 당황스러워한다. 이런 친구도 있었다. ‘어이 그런데 전시장 가면 어떻게 하는 거지?’ ‘응 전시니까 그림을 보면 되지.’ 그 친구가 전시장에 오는 걸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았다. 더군다나 나의 그림이 정치와 관련 있는 ‘민중미술’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었으니 관객의 입장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예나 지금이나 전시장 풍경은 많이 바뀌지 않고 있다. 미술인 몇몇이 모여 잡담만 나누는 것이 보통이다. 미니멀 아트 등 모더니즘의 폐해를 극복하고 민중과 소통을 하자고 시작한 ‘현실과 발언’ 같은 미술운동도 관객으로부터 외면받고 자기들끼리만의 소통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가 오죽하면 파리만 날리는 내 전시장(1997년 개인전)에 ‘황신혜밴드’를 섭외해 전시장 안에서 신나게 놀았겠는가?(이 급하게 만들어진 공연엔 배우 ‘황신혜’가 오는 줄 잘못 알고 동네 아줌마들이 여럿 오긴 했다.) 대중들이 미술을 낯설어하는 요인은 또 있다. 나는 40년을 미술교육에 매달려 지냈다. 중등 교사로 10년, 대학교에서 미술교육과 교수로 30년이다. 이쯤 되면 미술교육에 도사가 되어 있음직한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내가 정년퇴임식에서 대부분이 교사인 제자들을 앞에 놓고 한마디 했다. “에… 내가 여러 가지 활동을 해왔는데 그중 가장 실패한 것이 뭐냐? 바로 ‘미술교육’이다.” 사실은 그 자리에서 한마디 더 하고 싶었다. “바로 그 증거가 미술교사인 여러분들이다.” 하마터면 실언이 될 뻔했다. 그 증거는 바로 나였으니까. 공주사대 미술교육과에 전임으로 간 것은 1980년이다. 처음 이 미술교육과에 가서 여러 가지 의문이 생겼다. 미술교육과의 커리큘럼이 다른 일반 미술대학과 같이 대부분 실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다른 교수들도 의문을 갖지 않고 지내는 터라 나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다. 몇 년이 지난 다음에야 나는 새로운 미술교육의 개혁안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미국의 ‘학문에 기초한 미술교육'(DBAE·Discipline Based Art Education)이다. 이는 미술을 실기만이 아니라 미학, 미술사, 미술비평과 같은 학문체계와 같이 지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미술교육이 실기 위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를 반성적으로 개혁한 미술교육론이다. 소련이 우주탐사선을 1957년에 발사하자 미국은 큰 충격을 받고 모든 부문의 개혁을 시도하는데 예술교육 혁신도 그중의 하나였다. 미술과는 아무 관계 없이 사는 보통 성인들을 대상으로 내가 만날 때마다 열심히 물어본 것이 있다. “10년의 초중등 교육과정 중에 미술시간은 어땠는지?” 대부분이 “난 미술시간이 좋지 않았어”(물어보는 나를 생각해서 ‘싫었어’ 대신에 돌아온 답이다)다. 싫은 이유는 수업시간에 아무리 그림을 그려도 대부분이 한 번도 칠판 앞에 잘 그렸다고 내걸린 적이 없기 때문이란다. 미술에 재능이 있어 선생님에게 선택받은 몇 명만 성취감을 맛볼 수 있는 미술시간이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술의 실패자로 남는다. 대부분(주로 남성의 경우에)이 미술시간을 좋아할 리가 없어 보였다. 미술 또는 미술시간에 대해 좋은 기억이 없는 일반 성인들을 미술전시장에 오라는 것은 그야말로 일종의 공황상태에 몰아넣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학문에 기초한 미술교육’ 이론은 이런 미술시간을 미술사, 미학 등 미술에 딸린 많은 이야기로 실기시간의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미술작품도 읽는다? 그렇다. 미술에서도 작품을 읽어야 한다. 이를 시각적 문해력(비주얼 리터러시)이라 한다. 대부분 미술은 감상한다고 한다. 일종의 감성적인 교감이다. 물론 이러한 느낌을 주고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밑에 깔려 있는 많은 이야기는 감성적인 교감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그래야 작품을 통해 세상과 교감할 수 있는 것이다. 원래 리터러시(문해력)는 브라질의 파울루 프레이리가 주창한 민중언어의 독해로부터 출발했다. 이는 민중들에게 자기의 언어로 세상을 읽고 쓸 수 있도록 한 민중해방운동의 일환이었다. 마찬가지로 비주얼 리터러시는 시각적 문맹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단초가 될 것이다. 구석기 시대의 알타미라 동굴벽화 이래 그것이 종교적이건 또는 의례용이건 미술에서의 시각적 문해력은 그 사회의 소통을 위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중세 기독교 시대, 그러니까 문자가 널리 보급이 안 되었을 때 성당의 벽면은 대부분 그림이나 조각으로 채워졌다. 성경 말씀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읽도록 한 것이다. 고려시대 탱화들도 대부분 불법을 도상으로 이해시키려는 의도로 제작됐다. 알타미라 등 구석기 시대 동굴벽화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사냥하는 동물들을 동굴 암벽에 그려 놓음으로써 자기들이 동굴 속에 풍부한 식량을 보유하고 있다고 믿는 ‘주술적 읽기’를 위해서 벽화를 그렸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복제 매체와 대중 매체, 디지털 매체의 이미지 폭주로 전통적인 그림은 더욱 설 자리를 잃고 있다. 더군다나 자본과 시장에 휘둘리며 좋은 그림들은 대중과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그림이 관객과 소통하는 독특한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자. 중국의 한 황제가 궁정 수석화가에게 그가 궁궐에 그린 벽화를 지워버리라고 했다. 그 벽화 속의 물소리가 잠을 설치게 한다는 이유였다. 널리 알려진 일화다. “샘이나 강, 폭포 그림을 보는 것은 열병 환자에게 효험이 있다. 또 한밤중에 잠들지 못하는 사람이 머릿속에 샘물을 그려보면 졸음이 찾아든다.” 르네상스의 뛰어난 건축가 알베르티가 퍼트린 말이다. 제주도 작가 강요배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화면 위에서 바람 소리와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르셀 프루스트는 한 방황하는 젊은이에게 “루브르박물관을 찾아 거기에서 화려한 궁정이나 왕을 묘사한 그림 앞에 서 있지 말고 샤르댕이 그린 작은 정물화를 보고 눈을 뜨고 삶의 활기를 찾을 것”을 권한다. 이 폭염 속에 우리를 식혀줄 그럴듯한 일화나 사례들이 아닌가? 이는 발터 베냐민이 말한 아우라와의 미메시스적 감응이다. 나는 미술을 항상 ‘사회적 영매’라고 말해왔다. 감성적 접신을 통해 항상 사회를 치유하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아직도 미술은 쓸모가 있어 보인다. 태초에 말씀(언어와 문학)보다 먼저 있었던 알타미라 동굴벽화부터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두 정상의 선언을 내려다보는 그림들에 이르기까지 그림은 우리 옆에서 펄펄하게 살아갈 것이다. 평화의집에 걸린 그림들, 특히 민정기 화백의 <북한산>과 신장식 교수의 <금강산>은 틀림없이 한반도의 정기를 모아 두 정상에게 평화와 통일의 메시지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평화의집에서 나오며 누군가는 이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그림이 멀리 있다고 하면 안 되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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