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눈에 보이지 않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릴 때 인사동 거리로 나간 적이 있다. 항상 관광객과 인파로 뒤덮였던 거리가 잿빛의 길만이 멀리까지 연결돼 있는 초현실적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언젠가 읽은 조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집이나 화실에서 칩거하며 ‘방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방콕’하는 동안 존 버거의 책을 비롯하여 꽤 많은 책을 읽었다.
존 버거는 누구인가? 많은 사람들, 특히 미술과 관련 있는 사람들에게 거의 필독서인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그가 주로 활동하던 시기인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그가 농민으로 살던 시기는 물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의 ‘시각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 한권의 책이 있다. 조슈아 스펄링이 지은 <우리 시대의 작가>는 ‘존 버거의 생애와 작업’이라고 부제 붙인 대로 그야말로 ‘마르크스 선동가 존 버거’의 탄생으로부터, 말년의 농민으로서의 활동까지 그의 다양한 활동과 일생을 잘 소개해준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눈에 보이는 세계’의 테두리 안에 살고 있다. 사람들은 ‘공간과 시간’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데도 이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특히 미술에서는 여러 가지 다르게 보는(또는 보일 수 있는) 방식을 통일된 혹은 표준화된 방식으로 보길 원한다. 이를 마르크스주의자의 시각으로 혁명적으로 바꾸기를 권하는 글이 바로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고정돼 있고 익숙한 시각의 문제점과 모순을 극명하게 설명해 줌으로써 우리의 습관화된 시각, 즉 삶의 방식을 바꾸라고 권하고 있다. 즉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다른 방식으로 살기’에 다름 아니다.
한 가지 사례로 그는 우리나라 미술에서는 거의 미술의 법칙으로 통용되는 ‘원근법’을 들고 있다. 르네상스 시기에 자본주의와 같이 시작돼 온 세상에 퍼진(서구 문명이 그렇듯) 이 원근법은 ‘그것이 유일하고 이상적인 것처럼 시야를 조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원근법을 사용하는 모든 소묘와 회화는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 그가 세상의 유일한 중심’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는 또 처음으로 중세기에 제작되기 시작한 ‘아담과 이브’ 누드화로 회화 속에 나타난 여자의 ‘벌거벗음’이 어떻게 ‘누드화’가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이 누드화에 나오는 여인들은 거의 앞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이 여인들을 소유하고 있는 관객(대부분 귀족이거나 왕족)이 그 여인과 그림의 소유주이기 때문이다. 그는 여성에 대한 이러한 ‘남성적 응시’를 시선과 젠더가 연관된 권력의 문제로 제기한다. 모든 남성들에게 여성을 소유로 생각하는 관습적 시선을 반성하게 한다.
그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우리들이 매일 접촉하는 광고에 할애하고 있다. 행복과 선망을 계속 쏟아붓는 광고 이미지는 그를 받아들이는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빼앗아 버리고 그들의 처지를 더욱 궁색한 것으로 만든다. 버거는 광고를 일종의 정치적 선택을 대신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광고는 소비를 민주주의의 대체물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광고는 사회 내부의 비민주적인 모든 것들을 은폐하거나 보상해 주는 일을 돕는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세계의 또 다른 지역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은폐해 준다는 것이다.
존 버거의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의 활동이 나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처럼 미술비평 활동이나 사진과의 협업으로 에세이집을 만들고, 시나 소설, 영화 시나리오를 쓰는 등의 활동을 하진 않았지만 그의 활동 가운데 초기 좌파적 ‘리얼리즘’ 비평이라든지 많은 글쓰기와 그의 이야기들, 특히 농촌에 들어가 벌인 실천적인 삶은(나는 단지 농촌에 폐교를 빌려 ‘예술과 마을’이라는 마을운동을 몇년간 했을 뿐이다) 내가 바라던 이상적인 활동이다. 그와 나는 시간적 차이가 있지만 일종의 도플갱어(똑 닮은 혹은 닮고 싶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존 버거는 일생을 기득권층에 저항하는 좌파적 활동으로 일관했다. 말년을 제네바에서 떨어진 산골짜기 마을에서 실제로 똥거름을 져서 나르고 농민들과 공동체적 삶을 일체화시키려 노력했다.
조슈아 스펄링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버거의 에세이를 통해 세상 보는 방식을 알게 됐다. 그것은 지적인 노동과 기꺼이 경험하려는 자세, 혹은 대지에 뿌리박고 살아가려는 자세 사이에서 어떤 모순도 없이 글 쓰고 사유하는 방식, 내가 볼 때는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존 버거에 대한 나의 헌사(獻詞)가 되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코로나19’는 자본주의의 ‘세계화’와 같이 온 지구로 뻗어 나가고 있다. 다행히 한국에서는 차츰 누그러드는 기색이다. 이 역병이 물러간 다음 한국 사회는 많이 변할 거로 보인다. 우선 바이러스의 공포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를 격리하고 피할 것이다. 서로 간의 관계에 피로감이 쌓이면서 무력증이나 우울증으로 발전할 것이다. 또한 불안감으로 인한 가짜뉴스와 타자를 향한 혐오가 남발될 것이다. 그로 인해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들은 더욱 궁지에 몰릴 것이다.
한편 감염을 피하기 위한 정부의 지침에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있다. 감염을 피하기 위해 사람 간에 거리를 두자는 제안이다. 우리 사회는 떼거리(또는 패거리) 지어 모이는 습관이 널려 있다. 온갖 지연 혈연 학연과 종교(신천지와 같은) 등을 통해 별의별 모임들을 다 만들어 내고 있다. 이번 기회에 이런 각종 모임들은 서로 간에 거리두기를 통해 ‘자발적 고립’이나 ‘혼자 사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홀로 독서(우리나라는 국민 중 52%가 1년에 책 한권도 안 읽는다는 통계가 있다)를 하고 이를 통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고하고, ‘별 하나 나 하나…’ 밤하늘의 별을 세며 나 자신이 우주의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보자. 이런 위기의 시기에 우리는 누구인지를 다시금 성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다 같이 ‘당혹스러운’ 바이러스 역병을 통과하고 있다. “당혹스러워한다는 건 겸손하게 자세를 낮추는 것, 황홀에 젖는 것, 잠깐 동안 미래를 내다보는 것, 경이롭게 기적을 보는 것일 때가 종종 있다”는 ‘당혹스러움’에 대한 존 버거의 말은 참고할 만하다.
인류는 끊임없이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눈앞, 즉 자기들 이익에 시선을 고정하면 과거는 물론 미래가 보이지 않는 법이다. 보는 방식을 바꾸면 더 좋은 세상을 만날 수 있다.
김정헌 ㅣ 화가, 4·16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