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들의 발화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 우리의 노인네들은 탑골공원이나 노인정에서 홀로 떠돌고 있다. 발화자는 득시글한데 청자가 없는 것이다. 한창훈의 우화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에 나오는 ‘얘기를 들어주는 집’의 쿠니,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모두 주위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소외되고 힘겨운 주변 사람들에게 삶의 활기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준다.
화가·416재단 이사장 나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화가인 내가 이야기에 꽂힌 것은 미술교육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부터다. 미술교사는 실기교육보다 미술에 따른 많은 이야기로 시각예술의 풍요함을 알려야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내 그림의 이력도 이런 나의 이야기 본능을 말해준다. 1980년대 나의 대표작으로 지목되는 <풍요한 생활을 창조하는 럭키모노륨>이나 <냉장고에 뭐 시원한 거 없나?> 같은 작품들은 이미 제목에서 어떤 서사를 품고 있다. 2004년에 연 ‘100년의 기억’이라는 개인전은 아예 100년의 우리 근대사를 그 당시의 기록사진들을 재현하면서 그 안에 있는 익명의 인물이 화자가 되어 당시를 진술하는 것으로 만들어 이미지와 이야기(미니 픽션)를 같이 전시했다. 이외에도 나는 주로 짤막한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싣곤 했는데 나중에 이를 묶어 책으로 내기까지 했다. 나는 그림을 이야기로, 때로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환치하는 일종의 크로스오버를 한 셈이다. 이는 장르 간 혹은 미디어 간 혼합 또는 융합을 통해 시각적 읽기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세상을 확장하기 위함이다. 언어가 충분하지 않았던 최초의 인류는 지금의 팬터마임 같은 몸짓이나 괴이한 소리, 막대기로 땅 위에 그려서 이야기를 전달했을 것이다. 이러한 의사소통이 예술로 진화했을 것이다. 만들어진 이야기인 픽션에는 예외 없이 가상의 세계와 상상력이 작동하는데 이것이 바로 예술의 시원이다. 그래서 인류에게는 말씀보다 마임, 연극, 춤이나 음악, 미술 등의 예술이 먼저인 셈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항상 상대방을 전제로 한다. 말로 하건 몸짓으로 하건, 또는 그림을 그려 보여주든 들어주는 상대가 있어야 한다. 아마 이런 이야기의 화자와 청자 사이의 협력관계가 인류의 진화를 촉진했을 것이다. 이러한 협력관계는 이야기와 그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종의 사회적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는 공동체적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사회적 정체성을 가지는데 이는 고립된 한 인간의 삶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앞으로 나아갈 미래까지 이야기의 한 부분’이라고 마이클 샌델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한 인간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이어받아 서사적 인격을 형성한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공동체의 전승되는 서사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이야기는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자주 만들어진다. 물론 이런 자리, 예컨대 술자리 같은 곳에서는 말을 독점하는 사람이 꼭 있기 마련인데 그들은 대부분 듣는 사람들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떠들 때가 많다. <파브르의 곤충기>에는 그악스럽게 울어대는 수매미들은 다른 소리는 전혀 듣지 못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인간 세상에서 혼자 말의 독점권을 행사하는 사람들은 앞에서 듣는 사람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든다. 말의 독점도 일종의 소음이며 갑질인 셈이다. 경청자는 남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이다. 남의 말에 귀 기울여 듣기란 정말 쉽지 않다. 언젠가 송기인 신부가 문재인 대통령을 경청의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평가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아마도 이런 경청자의 자세와 능력이 이번 남·북·미 정상의 ‘평화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리라. 특히 이야기와 경청에 관련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급속한 노령화다. 우리 사회는 베이비붐 세대가 슬슬 노인세대로 진입하면서 빠르게 노인이 증가하고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노인네가 될수록 말이 많아진다. 지금의 노인세대는 끝없는 질곡과 수난을 헤쳐온 사람들이다. 이런 노인들의 살아온 이야기는 한 사람마다 대하소설로 한권쯤 될 터이다. 그런데 이들의 발화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 우리의 노인네들은 탑골공원이나 노인정에서 홀로 떠돌고 있다. 발화자는 득시글한데 청자가 없는 것이다. 자기가 살아온 삶에 대해 누군가 귀 기울여 들어줄 사람이 있으면 그 발화자는 자기의 삶에 긍지를 느끼고 자기의 존엄성을 되찾지 않을까. 한창훈의 우화소설 <행복이라는 말이 없는 나라>에 나오는 ‘얘기를 들어주는 집’의 쿠니, 미하엘 엔데의 ‘모모’는 모두 주위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소외되고 힘겨운 주변 사람들에게 삶의 활기와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준다. 나는 10여년 전 ‘예술과 마을 네트워크’라는 자그마한 단체를 만들어 충북 제천의 대전리에 있는 폐교를 빌려 ‘마을 이야기 학교’를 연 적이 있다. 젊은 예술가들과 같이 주민 100명 내외의 작은 마을에 들어가 거기에 사는 노인네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그들과 같이 마을 잡지와 마을 영화제를 만들면서 지냈다. 거기에 사는 노인네들은 우리가 자신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도 서울 성북동을 중심으로 젊은 예술가들과 함께 지역에 사는 노인들의 얘기를 듣거나 수집하여 젊은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업에 이 이야기들을 활용하는 ‘이야기 청(聽)’을 진행하고 있다. 작년에 이어 올해 두번째 ‘이야기 청’을 운영하고 있는데 11월에 그 결실을 전시 형태로 만들어 보여준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 많은 젊은 예술가들의 참여와 다양한 방법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이야기는 인류가 생각을 품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되었다. 생각이란 가상의 세계를 떠올리는 것인데 자기가 경험하고 인지하지 못하는 세계까지 생각으로 품게 된다. 어린아이들이 어른의 세계를 상상하듯, 살아 있는 자가 죽음과 그 이후를 가상하듯, 이야기는 인간을 뛰어넘는 신과 영웅의 세계를 넘나들며 그렇게 진화해온 것이다. 이야기가 서사시에서 소설로 진화한 그 시원은 호메로스가 신과 영웅들의 세계를 그린 이야기 <오디세이아>로 그 이후에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지금까지 이야기의 원형으로서 전해지고 있다. 단테의 <신곡> 또한 지옥과 천당으로 이분화한 기독교의 세계에 연옥을 집어넣어 세계를 훨씬 다양한 이야기, 그러니까 소설의 세계로 진화시켰다. 지금 우리는 이야기가 실종된 사회에 살고 있다. 요즘 일어나는 대부분의 사건 사고는 수많은 파장을 몰고올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대부분 음모론이나 ‘가짜뉴스’에 지배당하고 있다. 그 이야기를 전달하는 중간 매체인 ‘언론’(인터넷 등 디지털 매체를 포함하여)이 잘못돼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언론 뒤에는 틀림없이 이 언론의 왜곡을 이용하는 잘못된 권력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지난 ‘이명박근혜’ 정부에서 이를 수없이 경험하지 않았는가? 인류가 시작되면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생성되고 소멸했다. 지금까지 전승되는 또는 살아 있는 모든 이야기는 그 도덕성, 공동선의 지향 여부로 결정된다. 공동의 가치를 논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그 사회를 발전시키고, 반대로 이야기의 균형이 깨지면 그 사회에는 혼란이 생긴다. 말을 독점하는 세력은 당연히 독재 세력이다. 반대로 누구나 이야기할 권리가 보장된 사회가 민주주의 사회다. 그래서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말하는 권력을 누리고 싶으면 남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나는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말하고 싶으면 남의 얘기를 먼저 들어라.’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름에 대한 편견과 판단을 유보하고 또는 혐오를 중지하고 이웃들의 고통과 상처를 보듬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지만 우리는 아름다운 공동체 속에서 살 수 있다. 공동체(Community)란 말의 어원도 서로 이야기가 소통하는 사회를 가리키지 않는가? 좋은 이야기는 더 나은 세계를 확장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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