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자유를 억압한 것은 실체적인 ‘법’만이 아니다. 예술가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예술가의 ‘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국가나 지방정부의 지원(그 산하에 있는 각종 위원회나 재단)이 필수적이다.
화가, 416재단 이사장 이제 며칠 있으면 ‘3·1운동’ 100주년이다. 1919년 3월1일은 온 겨레가 일제 치하의 압박과 사슬에서 놓여나 우리의 자주독립을 만천하에 외친 날이다. 우리의 근대에서 문화예술 탄압은 일제 치하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3·1운동 이후 많은 문화예술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탄압을 받았고 그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자의반 타의반으로 훼절하거나 자진해서 일제에 부역한 문인 미술가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광수, 최남선, 서정주, 노천명 등 문인과 청전, 이당, 운보 등의 미술인. 일제 당시의 억압과 탄압에 맞서 저항한 예술가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상화나 이육사 같은 저항시를 쓴 시인이 없지 않았으나 이 답답한 상황을 대부분이 이상처럼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었다. 해방 이후의 혼란기에도 남북으로 갈라진 이념의 갈등으로 예술가들은 북에서 남으로, 또는 남에서 북으로 갈가리 찢어졌다. 특히 남한에서는 친일 잔재 세력을 등에 업은 이승만 독재정권, 그 뒤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의 유신독재정권으로 인해 모든 문화예술 표현은 ‘반공’을 국시로 삼아야 했다. 특히 박정희의 유신정권에서는 많은 문인들이 가혹한 고문과 옥고를 치러야 했다. 아직도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은 탄압의 흔적으로 우리들 몸 안에 각인된 채 예술가들의 디엔에이에 흐르고 있다. 당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은 나중에 발굴된 김수영의 시 ‘김일성 만세’에 잘 나타나 있다. 미술에서는 1969년에 오윤 등이 김지하의 지도하에 ‘현실동인 선언’을 작성하고 전시회를 시도했으나 중앙정보부의 개입으로 불발로 끝난다. 본격적인 탄압은 1980년의 ‘현실과 발언’(이하 현발) 창립전으로 그 서막이 오른다. 1980년은 전두환이 막 정권을 탈취한 그 시절이다. 현발 회원들의 그림이 불순, 불량하다고 신고된 다음 미술회관은 곧바로 현발의 전시를 취소했고 회관 쪽이 단전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촛불 전시를 열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발은 전시장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 이후 이원홍 문공부 장관이 1984년에 ‘미술계에도 민중미술이 나타났다’고 공개적으로 경고하고부터는 좀 더 노골적으로 탄압이 들어왔다. 대표적인 사건이 ‘힘’전 사태다. 아랍미술관에서 열리는 ‘힘’이라는 전시장에 경찰이 들이닥쳐 작품들을 발로 짓밟고 작가들을 연행해 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민중미술 진영에서도 힘을 모아 저항하기 위해 단체를 결성하고 자체 전시장을 만드는데 바로 ‘전국민족미술협의회’(지금의 민미협)와 ‘그림마당 민’이다. 이후 민중미술은 수없이 탄압을 받게 된다. 당시 민중벽화가 많이 탄생했는데 유연복 작가가 자기 집에 그린 정릉벽화나 신촌벽화 등이 관에 의해 철거되거나 지워졌다. 대학가에도 많은 벽화가 만들어졌는데 지금은 경희대 벽화만이 살아남았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을 때 열린 ‘반고문전’은 말할 것도 없고,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이상호 전정호 손기환 홍성담 등이 탄압을 받은 대표적 작가들이고 그밖에도 많은 만화가와 판화가들이 그 표현 때문에 구속되거나 작품을 압수당했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하에서 벌어진 미술탄압 사례는 100건이 훨씬 넘는다.(민족미술협의회에서는 1988년에 ‘군사독재정권 미술탄압사례’집을 만들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았다.) 이밖에도 대표적인 사건이 이미 여러 차례 언급된 신학철의 <모내기> 사건이다. 이 사건은 작가는 구속되었다가 재판을 받고 풀려났는데도 그 작품은 아직도 구속되어 햇빛을 못 보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탄압을 받으면서도 민주주의와 궤를 같이해온 민중미술의 성과는 놀라울 정도다. 꽉 막혀 있던 우리 현대미술의 다양성을 넓혔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유일하게 ‘민중미술’이라는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서구 현대미술에서도 이루지 못한 새로운 ‘리얼리즘’의 승리라 할 수 있다. 얼마 전 한국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주관한 ‘다시 날아오르다’전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국가의 탄압을 받은 민중미술의 성과를 한데 모아 국립현대미술관은 ‘탄압(또는 저항) 전시관’을 만들 필요가 있어 보인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들어 탄압의 빈도는 줄었으나 ‘이명박근혜’에 오면 직접적인 탄압보다는 교묘하게 모든 국가의 지원을 배제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름하여 ‘블랙리스트’다. 박근혜 정권에서 본격적인 블랙리스트가 등장하지만 사실은 이명박 정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직접적인 탄압 대신 문화예술계의 기관과 단체부터 손을 보기 시작하는데 문화예술위원장인 나를 비롯한 국립현대미술관 김윤수 관장(지난해 타계), 황지우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 등 주로 문화부 소속 기관장이 대상이었다. 소위 ‘좌우 균형화 전략’을 앞세운 일대 숙청이었다. 그 앞장에는 문화부 장관의 완장을 찬 유인촌이 있었음은 모두 아는 사실이다. 이렇게 많은 미술적 표현을 문제 삼고 탄압한 당사자는 물론 국가기관이다. 국가권력의 탄압 이면에는 아직도 살아 있는 ‘국가보안법’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이는 법을 빙자한 국가폭력일 따름이다. 이 예술가의 자유를 억압한 것은 실체적인 ‘법’만이 아니다. 예술가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이 예술가의 ‘빵’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국가나 지방정부의 지원(그 산하에 있는 각종 위원회나 재단)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혜택을 받는 예술가는 극소수다. 이 지원을 받기 위해 예술가들은 어렵사리 서류를 만들어 신청을 해야 하고, 어려운 심사를 통과해서 혜택을 받는다 해도 나중에 정산 처리는 정말 눈물겨울 정도다. 화랑이나 옥션 등 미술시장도 ‘작품’을 ‘상품’으로만 취급하는 자본의 입맛만 고려하여 자유에 기반한 진정한 미술을 알게 모르게 은폐하고 배제한다. 재벌이 끼고 있는 미술관들, 예컨대 리움미술관과 삼성, 그들에게서 은총을 받은 몇몇 메이저 화랑이 그동안 미술계에서 얼마나 ‘독점자본주의’를 행사해왔는지는 웬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예술가들의 정신적 실존은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아니 ‘자유’ 그 자체다. 그러나 그들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빵 문제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예술사가 하우저는 권력자들의 지원이 끊겨 생활고에 시달린 렘브란트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자유 속에서만 안전하게 느끼는 예술가가 있는가 하면 안전 속에서만 자유롭게 숨쉬는 예술가도 있기 마련이다.” 예술가들, 특히 젊은 예술가들에게는 그들의 빵 문제가 자유 못지않게 시급한 일이다. 예술가들은 유네스코에서 규정했듯이 일종의 사회적 공익활동을 하는 이들이다. 예술가가 없는 사회를 상상해보았는가?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이들의 작업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회적 풍요를 위해 숨어 있는 우물이다. 8년 전 젊은 예술가 최고은이 굶어 죽지 않았는가? 그로 인해 예술인 복지법이 만들어지긴 했지만 아직도 젊은 예술가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은 제대로 갖추어졌다고 할 수 없다. 이들에 대해 ‘기본소득’ 같은 통 큰 대책이 필요하다. 예술가들은 지금도 ‘자유’와 ‘빵’에 목마르고 배고프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예술인들도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또 모든 억압으로부터 다시 한번 자주독립을 선언할 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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