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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고은영, 녹색으로 바위치기] 더 이상 ‘기후 침묵’을 견딜 수 없다

등록 2019-07-04 17:36수정 2019-08-02 15:34

고은영
녹색당 미세먼지 기후변화 대책위원장

내가 4살 때 지구 반대편에서 중대한 사건이 있었더랬다. “지구는 인간이 만든 온실가스로 인해 영향을 받고 있으며, 우리의 행성은 이미 장기적인 온난화 기간에 접어들었다. 더 이상 미적거릴 때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 99%의 확신을 갖고 있다.” 1988년 6월23일, 기후과학자 제임스 핸슨이 미국 상원의원 청문회에 출석해 기후변화에 대해 증언한 역사적 순간이다.

이후 핸슨 박사를 비롯한 기후 과학자들의 연구는 의혹이 아니라 사실임이 증명됐다. 교과서에는 기후변화의 원인인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1997년 교토의정서와 2015년 파리협정으로 이어지는 국제적 약속을 체결했다고 적혔다. 협약들은 종종 출제되는 시험문제 중 하나였다. 기후위기를 주제로 한 에스에프(SF) 영화가 쏟아졌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온난화로 인한 지역 불평등 문제를 다뤘을 때 ‘역시 개념 프로그램’이라며 박수를 받기도 했다. 미적거릴 때가 아니라고 말하던 과학자들은 기후변화가 장장 31년에 걸쳐 한가한 교양으로만 자리 잡는 것을 보며, 깊은 후회감에 빠진다고 토로했다.

그 교양의 시대에서 자란 나는 지금 35살이다. 기후위기가 가장 빠르게 닥치고 있는 제주에 살기에 녹색당의 기후변화 대책위를 맡은 지 두달. 그사이 여름이 시작됐다. 습관처럼 질병관리본부 홈페이지를 열어 온열질환자 발생 통계를 살핀다. 문서 위 숫자는 폭염에 쓰러지는 야외 노동자와 농민, 쪽방촌 빈민의 진료 기록이기도 하다. 알 수 없이 초조한 마음에 제주와 전남의 해양 관측 정보를 살피기도 한다. 제주는 세계 평균 속도보다 3배 빠르게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는 지역이다.

찾아서 보는 기록 외에 나를 찾아오는 소식도 있다. 대부분은 나쁜 뉴스다. 프랑스를 비롯한 남부 유럽은 45도를 넘는 폭염 속에서 건강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비상이 걸렸으며, 알래스카에서는 빙하가 녹아 홍수가 일어나고 심지어 산불이 거세게 일고 있다는 것. 그린란드에서는 해빙을 촉진하는 빙저호(빙하 밑 호수) 56개가 추가로 발견됐다는 것. 남극 대륙에서 멕시코 면적에 해당하는 얼음이 녹아내렸고, 멕시코 과달라하라시에는 한여름 우박이 쏟아져 1.5m나 쌓였다는 것 등. 모두 일주일 사이 일어난 재난이다. 인류는 너무 오래 미적거렸고, 결국 기후위기가 닥친 것이다.

저성장 시대에 죽도록 경쟁만 해오면서도 나름대로 친환경 삶을 지향했는데 기후위기까지 책임져야 하다니, 억울함도 있고 기후변화 정치를 설명하는 일의 고됨도 있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 있다. 바로 소름 끼치게 고요한 우리나라의 ‘기후 침묵’(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침묵)을 견디는 일이다. 전 지구적, 동시에 국가적 위기 사태 앞에서도 온실가스 배출 감량이 없는 정부, 석탄발전소 예산을 통과시키고 전 국토의 토건사업을 승인하는 국회, ‘기후 침묵’을 지키는 지방자치단체, 언론, 교육계 등을 확인할 때마다 무력감과 상실감이 밀려온다. 낡은 정치가 만든 법과 사회 질서는 이 침묵의 카르텔을 재생산하고 있다. 이미 세계 청소년 기후행동을 이끈 그레타 툰베리도, 기후변화를 취재한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도, 기후위기를 체감하는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맥락에서 극도의 우울감에 빠졌었노라 토로한 바 있다. 어쩌면 기후변화가 초래하는 세대적, 경제적, 지역적 불평등을 체감하는 우리 모두가 집단적 우울감에 빠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 우울감을 이겨내는 일은 오로지 ‘기후 침묵’을 깨부수는 일뿐이다. 탄소 배출 제로 법안을 직접 만들기 위한 전 세대적 요구와 행동에 돌입해야 한다. 이미 전국의, 전세계의 청년과 청소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오고 있다. 성장이 아니라 생존을 말하며 사회를 지키려는 그들에게, 지금의 기성세대는 다른 차원의 빚을 지고 있다. 수십년간 이어져온, 낡고 무능한 정치의 빚이기도 하다. 세계 청소년들은 5월에 이어 9월21일 또다시 기후파업을 예고했다. 생존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 모두가 거리로 나가야만 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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