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필규 ㅣ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지난달 29일 정세균 국무총리는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에서 체류자격이 없는 ‘미등록’ 이주민에 대해 언급했다. 미등록 외국인들을 ‘불법 체류자’로 내몰고 단속할 경우 숨기 때문에 ‘방역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고, 의료 접근성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 10일 같은 회의에서 국무총리는 성소수자들을 특정 ‘커뮤니티’로 지칭했다. 특정 커뮤니티에 대한 비난이 ‘방역의 관점’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비난으로 인한 진단검사 기피의 피해는 전체에게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체류자격이 없는 이주민에 대하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미등록’ ‘비정규’라는 표현 대신에 경멸적 용어인 ‘불법 체류자’라는 표현을 고집해왔던 정부가 ‘미등록’이라는 표현을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했다는 점은 고무적이다. 정부의 이러한 접근은 이주민과 난민에 대한 출입국관리법의 적용과 이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정보, 진단검사 및 의료서비스 등에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분리해 바라보는 일종의 방화벽이 있어야 한다는 코로나19 유엔 지침에도 어느 정도 부합한다.
정부가 특정 ‘커뮤니티’, 즉 공동체로서의 성소수자들을 확인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코로나19 유엔 지침은 성소수자들이 코로나19 상황에서 높은 위험에 직면해 있고 통계상 비공식 부문에서 일할 가능성이 더 높고 실업률과 빈곤율 또한 높기 때문에 국가 차원의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하고, 정치인과 다른 영향력 있는 인물들은 성소수자에 대한 낙인효과와 증오 발언에 맞서는 의견을 개진해야 한다고 적시하고 있다.
왜 우리는 미등록 이주민과 성소수자의 숨을 가능성을 이야기하는가.
사망이나 상해에까지 이른 폭력적인 출입국 단속 사례가 다수 존재한다. 미등록 이주민들은 강제퇴거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권침해 피해를 구제받기 어렵고 강제퇴거를 위해 구금된 상황에서는 사실상 무기한 구금의 위험에 노출된다. 정부는 미등록 이주민을 법제상 재한외국인의 범주에서 명시적으로 제외해 법적 보호에서 배제하고, 정책과 관행을 통해 이주민, 특히 미등록 이주민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부추겨왔다.
정부는 성소수자 차별 금지 규정이 문제 된 차별금지법 제정 논의를 10년 넘게 질질 끌면서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을 공인해왔다. 유엔 자유권위원회가 2015년 한국 내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의 심각성을 고려해 한국 정부로 하여금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겠다는 공식적 선언을 하라는 권고를 하였지만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심지어는 2018년 제3차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이전 계획에서 사회적 약자로 별도 분류되어 있던 성소수자 항목을 삭제하기도 했다.
그동안 미등록 이주민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에 사실상 앞장서왔던 정부가 차별과 혐오를 자제하자고 호소하는 기이한 형국이다.
정부의 정책이 일관된 것도 아니고 지자체나 일선 현장에서 정부의 정책 방향이 제대로 관철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주민에 대해서는 방역용 마스크나 재난지원금 등에서 차별이 있어왔고, 이주민에 대한 낙인, 차별, 인종주의, 외국인 혐오 등은 여전히 팽배해 있다. 혐오의 막장을 보여주는 일부 언론 기사, 여러 지자체의 과도한 개인정보 노출, 행정조치 등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드러나고 있다. 혐오와 차별의 결과로 인한 책임을 다시 혐오와 차별의 대상에게 돌리고 있는 양상이다.
정부의 발표 중 ‘방역의 관점’에서 이들의 의료 접근성을 높이고 비난과 혐오를 거두자는 내용은 이해가 되는 면도 있지만 불편하다. ‘방역의 관점’이 아니라면 비난과 혐오를 거둘 필요가 없고, 정부는 기존에 해오던 대로 계속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거나 방치하는 역할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인가. 감염의 위험 때문에, ‘우리’가 다칠까봐, 혐오와 차별의 대상을 특별히 이번만 ‘사람’ 취급을 하겠다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방역의 관점’이 빠진, 혹은 그것을 넘어선 이들의 인권이 무엇인가를 정부는 이야기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 아니 당장 인권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혐오와 차별의 고리를 끊을 것인가, 아니면 그 악순환을 강화시킬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인권은 항상 사람을 사람으로, 권리를 권리로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