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는 무지와 무신경을 타고 춤춘다.
소강상태에 접어들던 코로나가 용인 66번 확진자를 계기로 재확산 위험에 노출되면서 차별과 혐오의 날 선 비수가 드러났다. 보건당국에 따르면 다행히 이번 감염은 대규모 유행 사태 없이 관리 가능한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된다. 신속 정확한 의료시스템의 가동과 우리 국민의 수준 높은 시민의식이 지역사회 확산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고 본다. 이번에도 코로나에 관한 한 일류라고 자부하고 칭찬받기에 충분한 시스템과 문화가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작동되고 있음이 증명됐다.
그러나 동시에 이번 사건은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와 민낯도 드러냈다. 우한, 대구, 신천지, 동성애에 이르기까지 코로나는 사생활 침해와 차별, 혐오에 관한 아슬아슬한 줄타기 아래 관리돼왔다. 언론과 시민은 때로는 무지해서, 또 때로는 무신경하게 차별과 혐오의 말을 쏟아냈다. 무지와 무신경은 개선의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그나마 덜 절망적이다.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의 혐오가 상대를 깊숙이 찌른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럴듯한 논리로 반격하는 오만한 자신감을 마주할 때다.
동성애 차별과 혐오 문제를 촉발한 보도는 의미심장하게도 보수적인 주류 기독교계 신문의 종교담당 기자를 통해서였다. 이 보도를 계기로 진흙탕 물을 휘젓듯 동성애에 관한 자극적인 기사가 쏟아졌다. 해당 신문을 비롯해 몇몇 언론은 비판을 수용하며 자성론을 펼치기도 했으나, 이미 대중의 뇌리에는 차별적 요소와 혐오가 각인된 뒤였다.
보도를 지켜보며 불편한 마음에 여기저기 관련 내용을 점검하던 중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동성애자를 향한 폭력적 낙인이 넘쳐났고, 악의 가득한 비난이 확진자 거주 아파트 출입문에 손글씨 대자보로 붙은 경우도 있었다. 그중 해당 기사를 최초 보도했던 기자가 자신의 신문사 노조가 발표했던 성명을 조목조목 반박한 글이 가장 압권이었다. 그는 국민의 알권리라는 말도 썼고, 동성애자를 ‘인권특권층’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동성애자를 향해 당장 피해자 코스프레를 멈춰야 한다고 준엄하게 꾸짖기도 했다. 또 정당한 비판이 혐오로 둔갑한 것이라며 신천지, 동성애자에 대한 비판은 혐오 표현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도 펼쳤다.
<말이 칼이 될 때>라는 책을 출간한 홍성수 교수에 따르면 어떤 말이 혐오 표현이 되고 되지 않는지는 혐오의 효과와 관련해 정의된다. 남혐과 개독이란 말은 불쾌하고 부적절한 표현일 수 있으나 혐오 표현이 될 수는 없다. 남성과 기독교가 한국 역사의 과거와 현재 어느 시점에서도 소수였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또 소수자 차별의 맥락이 있는 한, 표현의 수위와 상관없이 차별적 표현은 혐오 표현이 된다. 특히 공인이나 미디어에 의한 혐오 표현은 개인적 불쾌감이나 막말에 머물지 않고 입증 가능한 고통과 사회적 배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 엄격하고 심각한 문제로 다뤄야 한다.
증오범죄는 진공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편견을 조장하고 차별적 괴롭힘이나 모욕적인 말이 아무렇지 않게 통용될 때 증오 선동은 조장된다. 5·18 민주화운동, 세월호, 여성, 다문화, 지방대, 비정규직…. 한국 사회에서 성별, 인종, 민족, 종교 등 추상화된 단어 아래 똬리 틀고 있는 혐오와 차별의 스펙트럼은 깊고도 넓다.
그렇기에 혐오 표현을 막아야 할 의무는 우리 모두의 몫이겠지만 공인과 미디어는 더더욱 오만한 무지에서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것이다.
한선 ㅣ 호남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