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ㅣ 소설가
요사이 우리를 가장 비통하게 한 영상은 영화나 드라마가 아닌 뉴스에 있지 않았을까. 여행가방에서 숨진 소년과 멍투성이에 화상 입은 모습으로 편의점에 피신해 있던 소녀를 보도한 영상 말이다. 영상 속 두 아이는 같은 아홉살이다.
영상을 본 누구라도 그 아이들을 죽게 하고 죽기 직전까지 몰고 간 계모와 계부, 그리고 친부모를 향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다스리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식, 혹은 자식과 다름없는 아이를 학대하는 마음은 대체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가방에 가둔 아이가 해쓱해진 채 자기 용변에 뒤섞인 모습을 보고도 아이를 더 작은 가방에 가두는 비정함은, 제대로 못 먹어 비쩍 마른 아이 목에 쇠사슬을 감고 뜨거운 팬으로 손가락을 상하게 하는 그 비정함은 대체…. 분노는 아이들을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두 아이에게 어른으로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는 걸 나는 보고 들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한마음으로 분노하고 슬퍼하는 사이, 또 다른 아이들이 가정에서 다치거나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답답하다 못해 괴롭기까지 하다.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고 심지어 학대를 저지를 때, 제도적으로 그 아이들을 보호하는 방법을 우리 사회는 왜 적극적으로 찾아서 실행하지 못하는 것일까. 가령 여행가방에서 죽어간 소년은 아동학대가 의심된다는 신고가 있었는데도 경찰과 아동보호기관은 다시 가정으로 돌려보냈고, 그 뒤 아이의 상태를 더 이상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 편의점으로 도망친 소녀 역시 위기아동으로 등록되어 있었으나 소녀의 집을 직접 방문한 학교나 아동기관 소속의 어른은 없었다. 코로나19와 인력난을 감안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소극적이고 안일한 사회 감시망이 안타깝기만 하다.
무심한 어머니와 어머니의 폭력적인 동거인 사이에서 고통받는 두 소년이 등장하는 황정은의 단편소설 ‘소년’(<일곱시 삼십이분 코끼리열차>), 이 소설은 형이 동생을 지하철에 태워 보내며 오십까지 센 뒤 깨끗한 옷을 입은 어른을 골라 함께 경찰에게 가라고 당부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형제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이 고작 미지의 어른일 뿐이라는 소설의 설정이 압도적으로 슬픈데, 지금 와서 이 작품을 다시 읽으니 그렇게라도 동생을 살리려 했던 형의 절박한 판단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과연 동생은 경찰의 보호를 제대로 받았을까, 하는 의심이 들면서 현실이라면 경찰이 동생을 다시 원가정으로 돌려보내며 형식적인 조사만 했을 거라는 괴로운 불신을 저버릴 수가 없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프리모 레비는 증언 에세이 <휴전>에서 ‘후르비넥’이라는 아이를 증언한 바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태어난 후르비넥, 그에게는 부모도, 언어도, 이름도 없었다. ‘후르비넥’은 그저 아이가 의미 없이 내뱉는 옹알이가 그렇게 들려 붙여진 임시 이름일 뿐이다. 꼬챙이처럼 마르고 허리 아래가 마비된 후르비넥이 건장한 어른도 한달을 버티지 못해 죽어가던 악명 높은 수용소에서 3년가량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군가의 선의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령 후르비넥을 보살피며 언어를 가르치려 했던 열다섯살 헝가리 소년과 어떻게든 후르비넥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고 싶어 했던 수용소의 몇몇 어른들….
아동학대는 분명 부모의 잘못이다. 그러나 그 학대를 방지하고 아이를 온전한 성인으로 키워내는 건 눈 밝은 제도의 몫이 아닐까. 아동학대가 의심되는 경우엔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부모에게서 아이를 분리하는 제도가 절실해 보인다. 부모의 권리는 생명 앞에서 무용하고, 무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