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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조해진의 세계+] 누구든 살아 있으라

등록 2020-11-01 15:55수정 2020-11-02 02:39

조해진 ㅣ 소설가

택배 노동자의 열세번째 부고 소식을 기사로 본 날, 답답함과 미안함으로 마음이 무거웠다. 열두명이나 사망한 후에도 죽음이 다시 반복됐다는 것에 대한 답답함, 그리고 안온한 내 책상에 앉아 그 기사를 볼 수밖에 없는 미안함이 똑같이 절박하게 무겁기만 했다.

책장에서 하명희의 소설집 <불편한 온도>를 꺼내 수록작 ‘꽃 땀’을 다시 읽었다. ‘꽃 땀’은 대학 등록금을 날려버린 아버지 때문에 서울에 와서 택배 기사를 시작한 주인공의 하루를 그린 작품이다. 작가의 등단작이기도 한 이 단편소설은 2009년, 그러니까 11년 전에 발표됐다. 그래서 축구를 좋아하는 주인공은 토트넘의 손흥민은 모르지만 맨유의 박지성은 안다. 소설을 읽고 난 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소설의 배경은 분명 11년 전이지만 주인공의 하루, 본격적인 배달 전에 택배 물품들을 하차하여 분류하는 ‘까대기’까지 감당하느라 과로가 누적되고, 회사에 직고용된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개인사업자로 등록되어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현실은 11년의 세월을 무색하게 할 만큼 지금도 그대로인 것이다. 박지성 선수는 이미 6년 전에 은퇴했는데 말이다.

노동자의 죽음은 택배 노동 현장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작년 말에 은유 작가의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을 읽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있는데, 이 책은 현장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가 선배 직원들의 비인간적인 대우에 투신한 김동준군과 생수 공장에서 리프트에 깔려 사망한 이민호군 등의 이야기를 다룬다. 눈여겨보지 않는다면 이름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이 아이들의 죽음을 대가로 우리는 클릭 한번으로 생수를 비롯한 여러 물품을 ‘총알’처럼 빠르게 배달받고 있었던 것이다. 2년여 전에는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김용균군이 아프게 죽었고, 공장과 공사장, 지하철역의 스크린도어에서도 노동자들은 꾸준히 죽어갔다. 이 비참한 일들은 박민규 소설가의 표현을 따른다면 ‘사고’가 아니라 ‘사건’이다. 그에 따르면 사고는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을 의미하는 반면, 사건은 개인 또는 단체의 의도하에 발생하는 일이다(김애란 외, <눈먼 자들의 국가>). ‘알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그 죽음들도 회사의 이익과 고객의 편의 때문에 발생한 비극이었으니 사건이 맞다. 2인1조의 규칙을 지켰다면, 사전 교육과 실습이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아니 눈 밝은 어른이 한번이라도 제대로 그 사정을 봐주었더라면 민호와 용균·동준군 모두 지금도 살아 있을 것이다. 일하고 사랑하며 살고 있었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사나흘에 한번 정도 귀갓길에 생수를 산다. 원래는 인터넷으로 사던 대표적인 생필품이었다. 코로나 시대가 종결된 후에도 세제나 쌀처럼 무거운 상품은 직접 사려고 한다.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산업재해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이 제대로 위로와 보상을 받는지, 기업들이 재발 방지를 위해 내놓은 대책을 약속대로 실행해가는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등 노동자 편의 법안들이 연내에 입법되는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죽음은 돌이킬 수 없기에 이런 다짐은 무력하고 보잘것없다. 보잘것없어서, 더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알지 못하는 아이의 죽음>에도 인용된 ‘비가2’(기형도)의 한 구절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라고 써본다. 어느새 무감한 소식이 되어버린 노동자의 죽음을 끊임없이 글로 환기시키고 불편하게라도 되새기게 하는 것이 글을 쓰는 사람에게 주어진 최후의 권리이자 의무이므로.

산업 현장에서의 죽음에 모두가 상주의 마음을 갖는 사회, 아니 상주가 될 필요도 없는 사회, 그러니까 일하는 중에는 단 한명도 죽지 않는 사회가 도래하기를. 노동자들의 땀이 바람 따라 흘리는 꽃들의 땀, ‘꽃 땀’처럼 아름답게 존중받기를. 새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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