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숙 ㅣ 그래픽노블 작가
“따라오지 마.”
그 아이는 우리만 보면 따라왔다. 진드기 때문에 더는 산으로 산책을 갈 수 없었다. 나는 당근이와 감자를 데리고 찻길을 건너 앞마을 논두렁을 달렸다. 논에서 오리들이 노는 봄이었다. 봉구를 만난 건 그 봄을 지난 8월이었다. 늘 가던 산책길을 바꾸어 다른 길을 택했다. 조금 걷자니 넓은 연못이 나왔다. 나루터가 있고 작은 배도 있었다.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갈대숲을 지나 연못을 한 바퀴 돌았다. 당근이도 감자도 태어나서 처음 타는 나룻배였다.
배에서 내려 예쁜 코스모스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뒤뚱뒤뚱 하얀 개가 우리를 향해 활짝 웃으며 달려왔다. 가라고 해도 쫓아왔다. 연못에 도착할 즈음 매일 그 하얀 개가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렇게 우리와 논두렁을 달리다가 마을을 벗어나는 길목에서 저의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 개는 코 위로 커다란 상처가 있었다. 주인에게 학대를 받았나 싶었다. 당근이와 감자를 따라 뛰던 그 개를 보고 한 아저씨가 알은척을 했다. “야, 봉구야 너 어디 가니?” 그때 아이 이름이 봉구라는 것을 알았다. 멀리 웬 차가 계속 논두렁 주위를 돌았다. 봉구와 막 헤어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 차를 만났다. 차 주인이 물었다. “우리 봉구 못 봤어요?” 그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아, 예. 우리 따라 산책하다가 집에 들어갔어요.”
며칠 뒤 나는 ‘봉구 아부지’에게 물었다. “봉구 입에 왜 상처가 났어요?” 올봄에 봉구는 논길에서 그의 딸의 차를 따라 집에 들어왔단다. 아마도 전 주인이 이 근방에 낚시를 하러 왔다가 버린 것 같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며칠간 그 주위를 떠도는 봉구를 보았다고 했다. 상처는 입마개 자국이 아닌가 추측했다. 그는 봉구를 위해 마당에 나무로 멋진 집을 만들어주었다.
코스모스가 지고 노란 벼 수확을 할 즈음 봉구의 배가 엄청 불렀다. 새끼를 가진 거다. “수컷인 줄 알았는데요? 왜 남자 이름을 지어주셨어요?” 나의 물음에 그가 대답했다. “남자처럼 살라고.” 봉구 아부지는 강화도 도장리에서 도감뿌리농원을 운영하고 있는 안재원 선생님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를 안 회장님이라고 부르고 나는 그를 봉구 아부지라고 부른다. 목줄을 묶어도 가만히 있는 착한 봉구도 보고 싶고 새끼를 낳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봉구네에 들렀다. 일주일 안으로 새끼를 낳을 거라고 했다. 산책 가면 꼭 쫓아오던 봉구는 오늘따라 따라나서지 않았다. 봉구 아부지는 집 안쪽에 봉구 집을 다시 지었다. 새끼 낳으면 따뜻하게 있으라고 전기담요까지 깔아주었다. 김장을 하려고 북어를 서른 마리 넘게 삶은 국물과 두세 마리의 북어 머리를 매일 봉구에게 먹인다고 했다.
봉구 아부지는 도장리에서 태어난 토박이이다. 도시에서 공부하고 일하다가 2000년에 돌아와 김정택 목사님과 2002년부터 친환경 농사를 지었다. 그때까지 시골에서는 농약을 주로 사용했다. 그는 농약 대신 우렁이와 오리들을 이용하여 벼농사를 시작했다. 친환경으로 재배한 쌀을 어린이집과 생협, 학교에 납품하여 왔다. 그의 주요 일은 도시와의 교류라고 했다. 도시의 아이들에게 우리가 먹는 밥에 대하여 알려주고자 도감뿌리농원을 만들었다. 아이들에게 직접 볍씨를 놓게 하고 모도 내게 한다. 여름에는 연못에서 물고기를 잡는다. 가을에는 함께 추수한다. 겨울에는 논에서 썰매를 타며 논다.
우리는 과거에 마을 단위의 씨족사회였으며 농경사회였다. 벼 이삭 하나에 쌀이 120개가 달려 있다. 씨앗 하나에 가지치기가 되니 보통 그 다섯 배의 쌀이 나온다. 농경사회에서 사람들은 최소 6개월을 논에서 살았다. 놀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고 농주도 만들고 흥도 나누니 모든 희로애락이 그 안에 있다. 쌀이 없어서 풀뿌리까지 먹던 어려웠던 시절, 사람들은 씨앗까지도 다 먹어버렸다. 불도 많이 났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는 집 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울타리 안에 볏짚으로 터줏가리를 만들었다. 그 안에 단지를 모셔두었다. 단지 안에는 볍씨와 각종 씨앗을 담았다. 집안에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딱 한 명, 맏며느리인 살림하는 이만 알았다. 그가 해마다 새 씨앗으로 바꿔 놓곤 했다. 집에 불이 나거나 재난이 생겨도 이렇게 볍씨를 살릴 수 있었다. 이 소중한 전통을 60, 70년대에 미신 타파라며 다 없애버렸다고 그는 안타까워했다.
다음날, 전화벨이 울렸다. 봉구가 새끼를 낳았다. 봉구 아부지가 영상을 보내주었다. 다섯 마리다. 엄마가 된 봉구는 새끼들을 열심히 핥아준다. “봉구야 수고했다.” 창밖에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