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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문정희 칼럼] ‘유방’의 몇 구절을 읊조린다

등록 2021-04-29 20:38수정 2021-04-30 09:27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이젠 식상할 정도라고 하지만 익히 알기 때문에 식상한 것인가. 뜻밖에 겉핥기로 알고 있을 뿐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목격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는 여성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페미니즘은 서로 다른 인간의 권리와 상호 존중이 본질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시집 제목을 ‘유방’이라고 하면 어떨까요?”

언젠가 한 특강에 나가 문학 얘기를 마치고 나오며 청중에게 불쑥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수강생 대부분이 남성이기 때문이었을까. 강의실에 순간 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유방은 손, 얼굴, 눈동자, 심장 등과 같이 신체의 부분을 지칭하는 말인데 다른 것과는 달리 유방은 곧 여성의 몸과 성적 이미지로 연결되는 것 같았다.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지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

이렇게 시작되는 ‘유방’이라는 시는 남성과 여성의 몸에 똑같이 달려 있으면서도 여성의 것만 문제가 되고 마치 수치스러운 과일이 달린 듯 싸매고 살아야 하는 여성의 정체성을 쓴 시이다. 결국 나이 들어 차가운 기계를 안고 유방암 사진을 찍으며 축 늘어진 이 유방이 자신의 것임을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 존재의 자각을 쓴 시인 것이다.

유방은 아기에게 젖을 먹여 미래의 생명을 키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오랫동안 잘못 학습된 남성 시각이라는 것이다.

이 글을 쓰며 내가 자작시를 스스로 인용하고 해설하는 위험을 감수하며 생각에 따라서는 이미 식상하기까지 한 페미니즘 주제를 다시 꺼내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이번 서울시장과 부산시장의 보궐선거를 전후하여 바라본 정치 주변이나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고 824억원을 지불하고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두 도시 서울과 부산 시장을 다시 선출했다. 그런데 이 보궐선거를 마치고 나서 여야 모두 권력 쟁취를 중심으로 손익과 득실을 따지는 데 치중할 뿐 중요한 한가지를 간과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언론들도 부동산 정책 실패, 무능과 내로남불에 대한 심판이었다는 등에 초점을 맞추며 중요 원인이 된 공무 수행 중 공직자가 일으킨 성문제를 새기는 데는 많이 소홀했다.

물론 이 문제를 선거전에 크게 부각시키는 것은 득표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렇듯 막대한 수업료를 지불한 원인이 공직자의 성희롱 문제였다는 점을 그냥 비켜가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히 분석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공직 수행 중이건 아니건 성희롱 성폭행은 그 자체가 범죄이다. 공직자로서 직위를 이용한 성희롱 문제는 더구나 허용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문제는 잠시 들끓는 여론이었다가 봉합되고 말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의 뇌리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박근혜 정부 초기 방미 중에 윤창중 대변인이 일으킨 성추문 사건이다. 이 문제는 워싱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박근혜 정부는 그 일로 크게 기우뚱거렸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막중한 공무 중에라든가, 대통령 방미 성과 훼손과 국격에 관한 문제라며 분개하다가 개인을 징계하는 정도로 끝나고 말았다. 그때 공직 사회 전반이 더욱 철저하게 반성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더 깊은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인류사 이래 최후의 식민지라 했던 여성이 비로소 침묵을 깨고 당당하게 입을 연 미투 시대의 도래를 그때 제대로 읽었다면 그 후 충남도지사 문제나 부산시장, 서울시장의 미투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당시 한 일간지에 “참지 말라. 침묵하지 말라”라는 칼럼을 썼던 나는 여성을 편든다기보다는 남성 성희롱에 대한 고발이 오래 학습된 하나의 구성물로서 여성을 지배하고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시대가 완전히 끝났음을 알리는 조종의 의미라는 요지로 그 글을 마무리했다. 침묵은 자칫 거짓과 악을 키운다는 것을 알고 여성이 비로소 입을 열고 말하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도 큰 전환이다.

그 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2017)로 ‘침묵을 깬 사람들’이라는 제하에 5명의 여성을 표지 인물로 내놓았다. 트럼프도 시진핑도 김정은도 아닌 무명의 미투 여성들을 커버 인물로 장식한 타임지는 그 자체로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강력하게 예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미투는 벌어졌다. 우리의 경우 특히 안타까운 것은 박원순 시장이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사)에 고은 시인의 만인보 집필 공간을 재구성한 ‘만인의 방’을 결국 철거한 것이다. 재능 있는 한 시인이 많은 업적에도 불구하고 미투 사건과 관련하여 명성이 추락하고 그를 기리던 공간을 급히 철거하는 장면은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하물며 비싼 예산을 들여 만든 그 공간을 철거해야 하는 상황을 겪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후 박원순 시장에게 닥친 큰 비극을 보며 많이 혼란스러웠다.

결국 우리는 비싼 수업료를 지불하고 보궐선거를 치러야 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고도 선거 전후로 정치 사회적 분위기는 권력의지만을 공고히 하고 표심의 향방, 성패를 계산하는 데 더 골몰하는 것을 보며 허탈감마저 들었다.

페미니즘이라는 말이 이젠 식상할 정도라고 하지만 익히 알기 때문에 식상한 것인가. 뜻밖에 건성으로 이해하고 겉핥기로 알고 있을 뿐 제대로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을 목격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이는 여성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페미니즘이 그동안 사회 변화에 크게 기여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진실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가치관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최근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사이버 성범죄, 남녀 편 가르기와 혐오 문제 등으로 파생되는 현상들을 우려스럽게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페미니즘은 서로 다른 인간의 권리와 상호 존중이 본질이라는 것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우리의 어머니가 이를 통해/ 지혜와 사랑을 입에 넣어 주셨듯이/ 세상의 아이들을 키운 비옥한 대자연의 구릉/ 다행히 내게도 두 개나 있어 좋았지만/ 오랫동안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남자의 것이었고/ 또 아기의 것이었으니까…”

아직도 많이 비겁한 나는 ‘유방’의 몇 구절을 홀로 읊조려본다.

1830년경 프랑스에서 여성적 특성을 보이는 남성 환자를 가리키는 의학용어로 시작되었다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는 그동안 수많은 지성들이 이론과 실천으로 심화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금년 프랑스의 봄 축제인 ‘시인들의 봄’은 “웅장한 봄”(Magnifique Printemps)이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행사를 벌였다고 한다.

뜻밖에 프랑스 유명 시인 부부가 나의 시 ‘유방’을 불어로 낭송하는 것을 유튜브로 보고 나는 잠시 몸을 휘청였다.

문정희ㅣ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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