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간 전시 작통권 환수 논의 일지
2003년 노대통령 대책 지시…환수계획 확정
지난해 공식통보하자 미 “협의 가능” 긍정적
조율거쳐 약정 체결…극비진행에 정치 쟁점화
지난해 공식통보하자 미 “협의 가능” 긍정적
조율거쳐 약정 체결…극비진행에 정치 쟁점화
되짚어본 작통권 환수 논쟁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를 둘러싼 논쟁이 좀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 14일 한-미 정상회담 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전시 작통권이 정치적 문제가 돼선 안 된다”는 견해를 밝혔지만, 한나라당은 미국에 의원단을 보내 저지 운동을 벌였다. 보수세력은 여전히 노무현 정부의 섣부른 자주노선이 한-미 동맹을 뒤흔들고 있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런 논란은 전시 작통권 환수 논의의 진행과정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데서 비롯된 측면이 적지 않다. 〈한겨레〉는 전·현직 외교·안보 분야 당국자들을 통해 논의의 전말을 추적했다.
미, “한-미 동맹 재조정하자”=참여정부 출범 직후인 2003년 2월 말 리처드 롤리스 미 국방부 부차관보가 서울을 방문했다. 그는 우리 정부 당국자들에게 “포타(미래 한-미 동맹 정책구상)를 구체적으로 협의하자”고 밝혔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2년 12월 한-미 두 나라가 ‘한-미 동맹의 의미와 역할, 구조, 규모, 지휘관계 등을 다음해부터 논의해 2년 안에 청사진을 마련한다’는 내용으로 서명한 포타 약정서의 집행을 요구한 것이다.
미국은 김대중 정부 막바지에 특히 한-미 동맹 재조정에 적극성을 보였다. 정부 고위 당국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미국은 17대 대통령 선거일이 임박한 2002년 11월6일, 한국을 방문한 피터 페이스 국방차관을 통해 고위 안보 당국자에게 한-미 동맹 재조정을 공식 요청했다고 한다.
미국의 요구는 그해 12월5일 워싱턴에서 열린 제34차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에서 포타 추진 합의로 이어졌고, 뒤이어 참여정부를 압박하는 근거가 된 포타 약정서가 서명됐다. 미국은 이 연례안보협의회에서 용산 주한미군 기지 이전 합의의 이행도 강하게 요구했다.
노 대통령의 취임 직전인 2월 초에는 리언 리포트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 정대철 당시 민주당 의원 등 노 당선자 측근들을 만나 동맹 재조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정부 관계자는 “최근 정대철 전 의원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2003년 2월 러포트 사령관이 전시 작통권 환수를 제안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으나, 당시 미국은 노 당선자 쪽에 김대중 정부와 오간 동맹관계 재조정 협의 내용과 미국의 뜻을 설명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 “능동적으로 대처하라”=롤리스 부차관보의 제안으로 동맹관계 재조정은 노무현 정부 초기의 ‘화두’가 됐고, 한-미 안보 당국자들은 그해 4월 제1차 포타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
이 무렵 노 대통령은 이종석 당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현 통일부 장관) 등 핵심 참모를 불러 특별지시를 내렸다. “주한미군 재조정이 피할 수 없는 대세라면, 능동적으로 대처해 국익을 최대화하는 방안을 강구하시오.” 이 사무차장과 조영길 당시 국방부 장관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어떻게 국익을 대변할 것인지 고민에 들어갔고, 전시 작통권 환수를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의 ‘능동적 대응’에는 우리의 ‘왜소한’ 안보 주도권에 대한 문제의식도 상당히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인 2003년 1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자 미국에서 대북 선제공격론이 제기됐지만, 전시 작통권이 없는 한국 대통령은 여기에 손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의 고민은 그해 6월 미국이 주한미군 일부를 감축하겠다는 뜻을 우리 정부에 전해오면서 더욱 가속화했다. 이 무렵 노 대통령은 전시 작통권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업무를 끝낸 뒤 관저로 외교·안보 분야의 행정관들을 불러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그해 7월 전시 작통권을 2010년까지 환수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 ‘자주국방 추진계획’을 마련해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고심하던 노 대통령은 국방부 안을 수용했다”며 “그 해 8·15 경축사에서 밝힌 ‘자주국방론’은 국방부의 계획을 개념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보고서 채택 과정에선 상당한 진통도 뒤따랐다고 한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핵심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김희상 당시 국방보좌관이 책상을 치면서 환수에 반대할 정도로 내부 논쟁이 거셌다”고 전했다. 또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을 강조하며 상대적으로 군비를 늘리지 않고 전시 작통권을 환수할 것이냐, 아니면 신무기 구입 등 국방력 강화를 통해 전시 작통권을 환수할 것이냐를 놓고도 적지 않은 토론이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 군 당국, “2010년은 어렵다”=그렇다면 정부가 미국 쪽에 전시 작통권 환수 방침을 제기한 것은 언제이고, 애초 계획인 2010년을 2012년으로 수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환수 방침을 미국에 공식 통보한 것은 2005년 9월의 한-미 안보정책구상회의(SPI)라고 한다. 2003년 7월 환수 방침을 정한 뒤로도 2년 이상이 흐른 시점이다. 이 기간에 정부는 한-미 동맹 재조정 협의를 진행하면서 전시 작통권 환수에 대비한 군 구조개혁과 군사력 강화 방안 등을 면밀히 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군은 2005년 중반께 “전시 작통권 환수에 따른 새로운 지휘체계 보강, 특히 합동참모본부 강화 및 정보력 증강을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환수 적기를 2012년으로 늦췄다. 그리고 그해 9월 안보정책구상회의에서 미국 쪽에 “전시 작통권 환수 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그럴 만하다. 동맹관계 재조정에서 협의될 수 있는 사안”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협상을 지켜본 정부 당국자가 전했다. 럼스펠드 “적절히 받아들인다”=이어 2005년 10월 한국에서 열린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 참석한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한국의 전시 작통권 환수 논의 요구를 적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 고위 당국자들이 전시 작통권 환수 논의가 자신들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하고, 협상의 주요 의제로 올리는 데 동의한 것이다. 이후 양쪽 안보 당국자들 사이의 실무협의를 거쳐, 두 나라는 올 3월 이른바 ‘전시 작통권 환수 협상에 관한 4대 약정’을 체결했다. △한-미 동맹 유지 △대북 억지력 저하 방지 △주한미군 계속 주둔 △한반도 유사시 압도적 군사력 유지 등을 담은 이 약정은 전시 작통권 환수에 따른 안보공백을 최소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14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밝힌 ‘정치문제화 반대’도 두 나라 사이의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이 무렵 노 대통령은 이종석 당시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현 통일부 장관) 등 핵심 참모를 불러 특별지시를 내렸다. “주한미군 재조정이 피할 수 없는 대세라면, 능동적으로 대처해 국익을 최대화하는 방안을 강구하시오.” 이 사무차장과 조영길 당시 국방부 장관은 미국과의 협상에서 어떻게 국익을 대변할 것인지 고민에 들어갔고, 전시 작통권 환수를 본격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노 대통령의 ‘능동적 대응’에는 우리의 ‘왜소한’ 안보 주도권에 대한 문제의식도 상당히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노 대통령은 당선자 시절인 2003년 1월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을 탈퇴하자 미국에서 대북 선제공격론이 제기됐지만, 전시 작통권이 없는 한국 대통령은 여기에 손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깊은 좌절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노 대통령의 고민은 그해 6월 미국이 주한미군 일부를 감축하겠다는 뜻을 우리 정부에 전해오면서 더욱 가속화했다. 이 무렵 노 대통령은 전시 작통권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노 대통령이 업무를 끝낸 뒤 관저로 외교·안보 분야의 행정관들을 불러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 문제를 논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그해 7월 전시 작통권을 2010년까지 환수하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한 ‘자주국방 추진계획’을 마련해 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정부 고위 관계자는 “고심하던 노 대통령은 국방부 안을 수용했다”며 “그 해 8·15 경축사에서 밝힌 ‘자주국방론’은 국방부의 계획을 개념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보고서 채택 과정에선 상당한 진통도 뒤따랐다고 한다.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 핵심 관계자는 “청와대에서 김희상 당시 국방보좌관이 책상을 치면서 환수에 반대할 정도로 내부 논쟁이 거셌다”고 전했다. 또 동북아 평화체제 구축을 강조하며 상대적으로 군비를 늘리지 않고 전시 작통권을 환수할 것이냐, 아니면 신무기 구입 등 국방력 강화를 통해 전시 작통권을 환수할 것이냐를 놓고도 적지 않은 토론이 오간 것으로 전해진다. 군 당국, “2010년은 어렵다”=그렇다면 정부가 미국 쪽에 전시 작통권 환수 방침을 제기한 것은 언제이고, 애초 계획인 2010년을 2012년으로 수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가 환수 방침을 미국에 공식 통보한 것은 2005년 9월의 한-미 안보정책구상회의(SPI)라고 한다. 2003년 7월 환수 방침을 정한 뒤로도 2년 이상이 흐른 시점이다. 이 기간에 정부는 한-미 동맹 재조정 협의를 진행하면서 전시 작통권 환수에 대비한 군 구조개혁과 군사력 강화 방안 등을 면밀히 검토했다. 이 과정에서 군은 2005년 중반께 “전시 작통권 환수에 따른 새로운 지휘체계 보강, 특히 합동참모본부 강화 및 정보력 증강을 위해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환수 적기를 2012년으로 늦췄다. 그리고 그해 9월 안보정책구상회의에서 미국 쪽에 “전시 작통권 환수 문제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 것이다. 당시 미국은 “그럴 만하다. 동맹관계 재조정에서 협의될 수 있는 사안”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협상을 지켜본 정부 당국자가 전했다. 럼스펠드 “적절히 받아들인다”=이어 2005년 10월 한국에서 열린 한-미 연례안보협의회에 참석한 도널드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은 “한국의 전시 작통권 환수 논의 요구를 적절히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밝혔다. 미국 고위 당국자들이 전시 작통권 환수 논의가 자신들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진다고 판단하고, 협상의 주요 의제로 올리는 데 동의한 것이다. 이후 양쪽 안보 당국자들 사이의 실무협의를 거쳐, 두 나라는 올 3월 이른바 ‘전시 작통권 환수 협상에 관한 4대 약정’을 체결했다. △한-미 동맹 유지 △대북 억지력 저하 방지 △주한미군 계속 주둔 △한반도 유사시 압도적 군사력 유지 등을 담은 이 약정은 전시 작통권 환수에 따른 안보공백을 최소화하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지난 14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밝힌 ‘정치문제화 반대’도 두 나라 사이의 이런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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