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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농사 짓고 보초 서던 지난날…더 힘든건 개성공단 막힌 지금”

등록 2013-07-24 21:11수정 2013-07-24 22:38

경기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통일촌 주민 민태승씨가 지난 10일 오후 통일촌 자유회관 옥상에서 마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파주/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경기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통일촌 주민 민태승씨가 지난 10일 오후 통일촌 자유회관 옥상에서 마을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파주/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파주 통일촌의 40년 돌아보니
73년 북 잘보이는 곳 마을 조성
군인·실향민들에 집·땅 나눠줘

황무지를 장단콩마을로 가꾸니
작년엔 찾는 사람 80만명
“마지막 바라는 건 평화로웠으면…”

당시 32살로 파주군 공무원이었던 민씨는 두살배기 첫딸을 업고 아내와 함께 통일촌에 들어왔다. 말이 마을이지, 산등성이를 불도저로 쑥쑥 밀어 덩그러니 세운 집과 황무지나 다름없는 농경지뿐이었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민통선 안에 가기로 하고도 불안감에 잠을 못 이뤘어요. 하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외면할 수 없었죠.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싶었습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고향에 쫓겨나 20년간 온갖 고생을 하며 ‘피난살이’를 해온 부모를 파주군 광탄면에서 모셔온 일이었다. 민씨의 고향은 통일촌에서 1.5㎞ 떨어진 임진강변 옛 장단군 군내면 정자리. 지척에 있어 찾아가봐도 잡초와 나무만 무성할 뿐 흔적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분단으로 갈라진 장단군 남쪽 27개 마을은 정전 직후 ‘군 작전상 이유’로 강제 철거됐다. 장단군은 1937년 당시 인구가 6만8293명이었고, 임진강 포구인 고랑포는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로 일제강점기엔 서울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다.

민씨 고향 정자리는 조선 후기 옹진군에서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하던 5대조 할아버지가 둥지를 튼 뒤 여흥 민씨 40여가구가 대를 이어 살아온 집성촌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날 즈음 낮엔 국군이, 밤엔 인민군이 번갈아 차지하는 남북의 각축장이 됐다. 피난이 여의치 않았던 장단군 사람들은 집에서 전쟁을 맞았다.

정전 직후 장단군은 최전방 민간인 출입 통제지역이 돼, 3만명 넘는 주민들이 쫓겨나고 마을은 한줌 재로 변했다. 주민들은 파주 금촌·봉일천, 고양 송포, 평택 등의 집단수용소로 강제로 옮겨진 뒤 뿔뿔이 흩어졌다.

정미소와 농토 등 재산을 남겨두고 빈손으로 고향을 떠난 민씨 가족은 피난 초기엔 죽조차 먹기 어려울 만큼 가난했다. 어머니가 군부대 음식찌꺼기를 얻어다 돼지를 키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민씨는 “초등학교를 나와 진학을 포기하려 했는데, 광탄중학교 교장 선생님 덕분에 기적적으로 중학교와 공업고등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입주 이듬해 민씨 가족 3대는 꿈에 그리던 고향 마을 옆 통일촌에 둥지를 틀었다. 7남매 중 장남인 민씨는 이곳에서 딸 넷을 더 낳아 딸부잣집 가장이 됐다. 5년 뒤엔 주민이 이사한 곳에 동생(66)도 들어왔다. 지금은 딸 다섯이 모두 결혼해 떠났고, 아버지(93), 아내(66)와 함께 통일촌에서 산다.

민씨와는 달리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적지 않은 실향민들은, 민통선 안 땅을 사거나 빌려 출퇴근하며 농사짓는 ‘출입 영농’을 하며 고향 주변을 맴돌고 있다. “민통선이 정해지더니 군이 ‘작전상 필요하니 일주일만 나갔다가 들어와라’고 했어. 가축과 세간을 모두 남기고 떠났는데, 60년이 지나도록 못 돌아가고 있어.” 민통선 들녘에서 만난 정자리 출신 전재규(78)씨가 눈시울을 붉혔다.

전쟁 이전 정자리, 그리고 동파리·백연리·하포리는 여름에 감자, 가을엔 무 농사를 지어 임진강 나루에서 배로 실어다 서울에 내다팔았다. 한 철 농사를 지으면 송아지 한 마리를 살 수 있었는데, 당시 송아지 값은 땅 4마지기(2600여㎡)에 해당하는 큰돈이었다. 전씨도 통일촌 입주를 신청했지만 나이(당시 38살)가 많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그에게 민통선은 거대한 벽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정전 뒤 미군이 자기네 맘대로 그은 민통선을 이제는 해제할 때가 됐지. 경기도 연천과 강원도 철원, 이런 데는 많이 해제됐잖아. 파주만 아직 그대로야.” 민통선은 54년 2월 주한미군 8군 사령관이 직권으로 설정했다.

살 만한 마을로 가꾸기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고향이 제각각인 군인 출신 주민들과 실향민 주민들이 섞여 살면서 갈등이 잦았다. 군인 출신은 군대식으로 하려 들었고 실향민들은 이를 마뜩잖아했다. 장교 출신과 하사관 출신 사이에도 신경전이 이어졌다.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이 육군 부사단장을 지낸 대령 출신이었는데, 예비역 장교들은 은연중에 대접받고 싶어했지요. 반면 민간인들의 느슨한 모습이 거슬렸던 모양이에요. 10년쯤 지나서야 스스럼없는 이웃이 되었죠.” 마을 노인회장을 지낸 육군 상사 출신 홍순태(83)씨가 어색했던 당시 분위기를 돌이켰다. 대구가 고향인 홍씨는 상사 월급으론 자식 넷을 키우기 어렵던 차에 집도 주고 농사지을 땅도 준다고 해 22년 군인 생활을 매듭짓고 통일촌에 입주했다.

주택과 농지는 공평하게 추첨으로 결정했다. 처음 10년은 장교 출신들이 예비군 중대장과 이장을 맡았다. 나이도 30살 안팎인 실향민보다 평균 10살가량 많았다. 그 뒤로는 민간인 출신이 이장을 맡기 시작했다.

초기엔 군인처럼 마을을 지키면서 황무지를 개간해야 했다. 밤에는 남성들이 실탄을 장착한 총을 들고 마을 무기고를 지켰다. 해마다 아이들까지 수백명이 배낭에 식량을 넣고 배로 임진강을 건너 파주읍 파주공고까지 왕복 30㎞가량 오가는 피난훈련도 해야 했다.

들판을 개간하다 지뢰가 폭발해 주민 1명이 숨지고 2명이 발목이 잘린 적도 있다. 밭을 갈던 경운기가 지뢰를 건드려 폭발하기도 했다. 입주 4~5년쯤 지나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지만, 지뢰가 무서워 맘놓고 논밭을 나다닐 수조차 없었다. 농사에 익숙지 않은 군인 출신 10가구 이상이 마을을 떠났다. 빈자리는 80년대엔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퇴임 뒤 세운 카터재단의 ‘사랑의 집짓기(해비타트)’ 운동 등을 통해 외부 주민들이 채웠고, 입주자 자녀들이 분가하면서 가구는 2배쯤 늘었다.

40년 세월이 흘러 주민 대부분은 노인이 됐다. 초기 입주자 가운데 30여명이 숨지거나 마을을 떠났다. 남은 주민들도 대부분 고령이어서 영농법인에 농사를 맡겨 짓는다.

내 것인 줄로 믿었던 토지를 둘러싸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힘겹게 개척한 농경지는 1983년 ‘수복지역내 소유자 미복구토지의 복구 등록과 보존등기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원래 땅주인 60여명이 되찾게 됐다. 소유주와 주민들 사이에 분쟁이 격해지자, 정부가 융자금을 지원해 땅을 매입할 수 있게 하는 방식으로 정리했다. 지난해엔 국유지를 관리하는 한국자산관리공사가 공시지가보다 비싼 값으로 매입할 것을 요구했다가 주민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마을 이장 이완배(60)씨는 “정부가 총알받이로 주민들을 입주시켜놓고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 농민들이 목숨 걸고 황무지를 농지로 만든 만큼, 농민들에게 매각하려면 황무지였던 입주 당시 감정평가 가격을 적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착 1세대인 민씨는 공직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마을 일에 적극 나섰다. 초대 새마을지도자와 이장을 10여년 맡다가 1991년 민통선 주민 대표로 파주군의원이 됐다. 파주시의회 의장도 맡는 등 네 차례 파주시의원에 뽑혔다. 그사이 마을은 도로와 농로를 포장하고 옹벽을 쌓고 하천을 정비하는 등 기반시설을 갖춰갔다. 85가구 주민들이 공동출자로 통일촌과 제3땅굴에 농산물직판장을 만들어 가구당 연 200만~300만원씩 수익금을 배분받게 된 것에도 민씨 구실이 컸다.

통일촌 주민들은 입주 당시 국가로부터 분배받은 2만6400㎡(8000평)가량의 황무지를 개간해 콩·인삼·벼농사를 지으며 지금의 ‘장단콩 마을’을 일궜다. 해마다 임진각 광장에서 열리는 파주장단콩축제는 파주개성인삼축제와 더불어 관광객 100만명 안팎이 찾는 국내 대표적 농산물 축제가 됐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마을이 한층 넉넉해지는 계기가 됐다. 남북 화해 분위기를 타고 안보관광객이 부쩍 늘자 마을에 대형 음식점 3곳이 생겨나는 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6·15 선언 당시에는 별 관심 없던 주민들도 개성공단이 생기고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급증하자 화해 분위기를 크게 반겼다. 안보관광은 제3땅굴, 도라산전망대, 도라산역을 거쳐 통일촌까지 민통선 북쪽 지역을 차량을 타고 도는 코스다. 2002년 5월 시작한 안보관광 참가자는 첫해 18만2650명에서 2010년 51만3006명, 2011년 60만3065명, 2012년 82만9234명으로 급증했다. 통일촌 주민 20여명이 마을 음식점에서 일하며 안보관광객들을 맞는다.

민씨는 “고심 끝에 고향에 들어왔는데 옛 고향 맛도 안 나고 허탈했다. 지금 돌이켜보니 고향을 위해 일도 하고 가족 모두에게 잘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40년째 외부 출입이 불편하고 북과 맞닿은 긴장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온 민통선 마을 주민으로서, 마지막 한 가지 바람을 털어놨다. “이명박 정부 때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올해엔 개성공단까지 막히니, 주민들이 걱정을 참 많이 해요. 남북관계가 좋지 않으면 전방마을 사람들이 가장 살기 힘들어집니다. 남과 북이 조금씩 양보해 교류하고 왕래하고, 평화롭게 지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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