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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국방·북한

금단의 땅 일군 40년 “남북 왕래라도 됐으면…”

등록 2013-07-24 21:55수정 2013-07-24 22:42

이틀 뒤면 한국전쟁 휴전협정을 맺은 지 꼭 60년이 된다. 남북은 2007년 5월17일 분단으로 끊어졌던 남과 북의 철길을 연결했다. 그날 서쪽에선 남쪽 열차가 경의선을 따라 휴전선을 넘어 개성으로 올라갔고, 동쪽에선 북쪽 열차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제진역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2013년 7월 현재, 남과 북은 철길뿐 아니라 교류와 협력도 끊어졌다. 지난 16일 민간인 출입통제선 안 동해북부선 제진역 철길은 검붉은 녹뿐만 아니라 칡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고성/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이틀 뒤면 한국전쟁 휴전협정을 맺은 지 꼭 60년이 된다. 남북은 2007년 5월17일 분단으로 끊어졌던 남과 북의 철길을 연결했다. 그날 서쪽에선 남쪽 열차가 경의선을 따라 휴전선을 넘어 개성으로 올라갔고, 동쪽에선 북쪽 열차가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제진역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2013년 7월 현재, 남과 북은 철길뿐 아니라 교류와 협력도 끊어졌다. 지난 16일 민간인 출입통제선 안 동해북부선 제진역 철길은 검붉은 녹뿐만 아니라 칡넝쿨로 뒤덮여 있었다. 고성/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민통선 안 통일촌 사람들
“전쟁 불모지를 농경지로
살림살이는 나아졌지만…”
남과 북 사이를 흐르는 임진강 위 ‘통일의 관문’이란 대형 표지판을 내건 통일대교를 지나던 지난 17일, 경기도 파주시 통일촌 주민 민태승(72)씨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북 사이에 왕래라도 자주 해야 할 텐데요….” 그가 사는 통일촌은 통일대교 건너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안에 있다.

통일대교는 남쪽에서 판문점을 거쳐 개성으로 가는 국도 1호선의 교량이다. 남북관계가 잘 풀렸을 무렵, 개성공단의 화물차와 개성 관광객을 태운 버스가 시원하게 달렸던 왕복 6차로의 그 다리다. “개성공단 잘 돌아가고 전방 관광객도 늘어나고 그래야 주민들 형편도 덩달아 나아지지요.”

하지만 다리는 한적했고, 바리케이드들만 지그재그로 촘촘했다. 취재진은 검문하는 무장 군인에게 신분증을 맡기고서야 민통선 안 통일촌의 임시 방문이 허락됐다.

통일촌 마을엔 집집마다 대문에 태극기가 걸려 있었다. 한가운데 옛 방공호 옆에는 345명이 대피할 긴급대피소가 북쪽의 연평도 포격 뒤 지난해 새로 들어섰다. 60년을 갈라놓은 분단 경계가 바로 코앞에 있는 것이다.

통일촌은 군사분계선 남쪽 4.5㎞ 지점인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 민통선 안 옛 경기도 장단군 지역에 있다. 한국전쟁 정전 20년이 지난 1973년 8월, 유신정권을 창출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대북 심리전 효과와 접경지역 유휴지 개발을 앞세워 조성한 이른바 ‘전략촌’이다. 북쪽에서 잘 보이도록 일부러 산등성이에 가지런히 집을 지었다.

처음 입주한 주민은 군 장교·하사관 출신 40가구와 실향민 출신 40가구였다. 집과 농지를 공짜로 나눠준다고 홍보하면서 실향민 사이에 입주 경쟁이 뜨거웠다. △군 복무를 마친 예비군 편성 대상자 △5인 가족 이내로서 노동력이 2명 이상인 기혼남자 △새마을정신이 투철하고 국가관이 확고한 자 등 입주 자격요건을 적용해 까다롭게 선발했다. 이스라엘 집단농장 키부츠를 본떠서 자급·자족·자존하는 공동체 마을을 내걸었다.

당시 32살로 파주군 공무원이었던 민씨는 두살배기 첫딸을 업고 아내와 함께 통일촌에 들어왔다. 말이 마을이지, 산등성이를 불도저로 쑥쑥 밀어 덩그러니 세운 집과 황무지나 다름없는 농경지뿐이었다. “공무원을 그만두고 민통선 안에 가기로 하고도 불안감에 잠을 못 이뤘어요. 하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외면할 수 없었죠.”

가장 먼저 한 일은 고향에서 쫓겨나 20년간 온갖 고생을 하며 ‘피난살이’를 해온 부모를 파주군 광탄면에서 모셔온 일이었다. 민씨의 고향은 통일촌에서 1.5㎞ 떨어진 임진강변 옛 장단군 군내면 정자리. 지척에 있어 찾아가봐도 잡초와 나무만 무성할 뿐 흔적조차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분단으로 갈라진 장단군 남쪽 27개 마을은 정전 직후 ‘군 작전상 이유’로 강제 철거됐다. 장단군은 1937년 당시 인구가 6만8293명이었고, 임진강 포구인 고랑포는 뭍과 바다의 산물이 모이는 집산지로 일제강점기엔 서울 화신백화점 분점이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다.

민씨의 고향 정자리는 한국전쟁이 끝날 즈음 낮엔 국군이, 밤엔 인민군이 번갈아 차지하는 남북의 각축장이 됐다. 피난이 여의치 않았던 장단군 사람들은 집에서 전쟁을 맞았다.

정전 직후 장단군은 최전방 민간인 출입 통제지역이 돼, 3만명 넘는 주민들이 쫓겨나고 마을은 한줌 재로 변했다. 주민들은 파주 금촌·봉일천, 고양 송포, 평택 등의 집단수용소로 강제로 옮겨진 뒤 뿔뿔이 흩어졌다. 정미소와 농토 등 재산을 남겨두고 빈손으로 고향을 떠난 민씨 가족은 피난 초기엔 죽조차 먹기 어려울 만큼 가난했다.

입주 이듬해 민씨 가족 3대는 꿈에 그리던 고향 마을 옆 통일촌에 둥지를 틀었다. 7남매 중 장남인 민씨는 이곳에서 딸 넷을 더 낳아 딸부잣집 가장이 됐다. 지금은 딸 다섯이 모두 결혼해 떠났고, 아버지(93), 아내(66)와 함께 통일촌에서 산다.

민씨와는 달리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적지 않은 실향민들은, 민통선 안 땅을 사거나 빌려 출퇴근하면서 농사짓는 ‘출입 영농’을 하며 고향 주변을 맴돌고 있다. “민통선이 정해지더니 군이 ‘작전상 필요하니 일주일만 나갔다가 들어와라’고 했어. 가축과 세간을 모두 남기고 떠났는데, 60년이 지나도록 못 돌아가고 있어.” 민통선 들녘에서 만난 정자리 출신 전재규(78)씨가 눈시울을 붉혔다. 전씨도 통일촌 입주를 신청했지만 나이(당시 38살)가 많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그에게 민통선은 거대한 벽과 같은 존재라고 했다. “정전 뒤 미군이 자기네 맘대로 그은 민통선을 이제는 해제할 때도 됐잖아?” 민통선은 54년 2월 주한미군 8군 사령관이 직권으로 설정했다.

살 만한 마을로 가꾸기까지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고향이 제각각인 군인 출신 주민들과 실향민 주민들이 섞여 살면서 갈등이 잦았다. 군인 출신은 군대식으로 하려 들었고 실향민들은 이를 마뜩잖아했다.

“예비역 장교들은 은연중에 대접받고 싶어했지요. 반면 민간인들의 느슨한 모습이 거슬렸던 모양이에요. 10년쯤 지나서야 스스럼없는 이웃이 되었죠.” 마을 노인회장을 지낸 육군 상사 출신 홍순태(83)씨가 어색했던 당시 분위기를 돌이켰다. 그는 집도 주고 농사지을 땅도 준다고 해 22년 군인 생활을 매듭짓고 통일촌에 입주했다.

주택과 농지는 공평하게 추첨으로 결정했다. 초기엔 군인처럼 마을을 지키면서 황무지를 개간해야 했다. 밤에는 남성들이 실탄을 장착한 총을 들고 마을 무기고를 지켰다. 해마다 아이들까지 수백명이 파주읍까지 왕복 30㎞가량 오가는 피난훈련도 해야 했다.

들판을 개간하다 지뢰가 폭발해 주민 1명이 숨지고 2명이 발목이 잘린 적도 있다. 밭을 갈던 경운기가 지뢰를 건드려 폭발하기도 했다. 농사에 익숙지 않은 군인 출신 10가구 이상이 마을을 떠났다. 빈자리는 외부 주민들이 채우고 입주자 자녀들이 분가하면서 가구는 2배로 늘었다.

40년 세월이 흘러 주민 대부분은 노인이 됐다. 초기 입주자 가운데 30여명이 숨지거나 마을을 떠났다. 남은 주민들도 대부분 고령이어서 영농법인에 농사를 맡겨 짓는다.

내 것인 줄로 믿었던 토지를 둘러싸고 우여곡절도 많았다. 힘겹게 개척한 농경지는 1983년 ‘수복지역내 소유자 미복구토지의 복구 등록과 보존등기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원래 땅주인 60여명이 되찾게 됐다. 마을 이장 이완배(60)씨는 “정부가 총알받이로 주민들을 입주시켜 놓고는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착 1세대인 민씨는 공직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새마을지도자와 이장을 10여년 맡다가 1991년 민통선 주민 대표로 파주군의원이 된 이후 네 차례 지방의원에 뽑혔다. 85가구 주민들이 공동출자로 통일촌과 제3땅굴에 농산물직판장을 만들어 수익금을 배분받게 된 것에도 민씨 구실이 컸다. 통일촌 주민들은 2만6400㎡(8000평)씩의 황무지를 개간해 지금의 ‘장단콩 마을’을 일궜다. 해마다 열리는 파주장단콩축제는 관광객 100만명 안팎이 찾는 국내 대표적 농산물 축제가 됐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마을이 한층 넉넉해지는 계기가 됐다. 선언 당시에는 별 관심 없던 주민들도 남북 화해 분위기를 타고 개성공단이 생기고 안보관광객이 급증하자 이를 반겼다. 2002년 5월 시작한 안보관광 참가자는 첫해 18만2650명에서 2011년 60만3065명, 2012년 82만9234명으로 급증했다.

민씨는 “처음엔 옛 고향 맛도 안 나고 허탈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고향을 위해 일도 하고 가족 모두에게 잘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40년째 외부 출입이 불편하고 북과 맞닿은 긴장 속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온 민통선 마을 주민으로서 마지막 한 가지 바람을 털어놨다. “이명박 정부 때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올해엔 개성공단까지 막히니, 주민들이 걱정을 참 많이 해요. 남북관계가 좋지 않으면 전방마을 사람들이 가장 살기 힘들어집니다. 남과 북이 조금씩 양보해 교류하고 왕래하고, 평화롭게 지냈으면 합니다.”

파주/박경만 기자 ma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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