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18년 6월12일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마무리한 뒤 공동성명 서명식을 하고 있다. 싱가포르/연합뉴스
젠 사키 미 백악관 대변인이 30일 언급한 조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 재검토’ 결과는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재가동을 희망해 온 한국 정부의 희망 사항을 상당 부분 받아들인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아직 최종 결과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2018년 6·12 싱가포르 공동선언을 출발점으로 삼아 북-미가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비핵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접근법을 상당 부분 반영한 모양새다.
문 대통령이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해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힌 것은 지금까지 크게 두 차례였다.
첫번째는 지난 1월18일 진행된 신년 기자회견이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이제 곧 출범할 바이든 행정부에게 “트럼프 정부에서 있었던 싱가포르 (공동)선언은 비핵화와 한반도의 평화 구축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선언이었다. 싱가포르 선언에서 다시 시작해서 보다 구체적인 방안을 이루는 그런 대화 협상을 해나간다면 좀 더 속도 있게 북-미 대화와 남북대화를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이어, 미국의 ‘대북 정책 재검토’가 사실상 막바지에 이른 지난 21일 <뉴욕 타임스> 인터뷰에선 “미국과 북한이 서로 양보와 보상을 ‘동시적으로’ 주고받으면서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비핵화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30일 나온 사키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과 미 <워싱턴포스트>가 소개한 미국 고위 당국자들의 발언을 모아 보면, 바이든 행정부가 싱가포르 공동선언을 대화의 출발점으로 삼아 ‘점진적이고 단계적으로 비핵화’를 이뤄내자는 한국 정부의 구상을 상당 부분 수용했음을 알 수 있다. 사키 대변인은 지난달 30일 브리핑에서 “우리 정책은 (트럼프 행정부 시절의) 일괄타결(그랜드 바겐·빅딜) 달성에 초점을 두지 않을 것이며,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에도 의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가 앞선 두 행정부의 접근법을 절충한 ‘스몰 딜’을 통한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을 해 나갈 것임을 강하게 암시하는 말이었다. 이어, 익명의 미 고위 당국자는 1일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우리의 접근은 싱가포르 합의와 다른 이전의 합의들 위에 (성과를) 쌓아가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런 결과를 도출해 내는 과정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 당국자는 “바이든 정부는 싱가포르 합의가 트럼프 때 이뤄진 것이어서 애초 부정적 입장이었는데 정부가 (미국의 생각을 돌리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바이든 행정부에게 싱가포르 공동선언은 자신들이 부정해야 하는 전임 행정부의 유산이었다. 또 이 합의에 대해서는 2018년 6월 합의가 공개된 직후부터 미국이 너무 양보했다는 ‘매파’들의 공격이 이어져 왔다. 그렇다고 이 합의를 폐기하면, 미국이 달성해야 하는 최종 목표인 ‘한반도의 비핵화’를 위해 북을 압박할 근거가 사라지게 되는 ‘외교적 리스크’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바이든 행정부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전 세계 앞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향하여 노력할 것을 확약”한 이 성명을 받아들이는 현실적 선택을 한 것이다.
그 다음 난관은 단계적 접근이었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는 지난 3월23일 브리핑에서 대북 정책을 재검토하며, 트럼프 행정부 시절 대북 정책을 담당했던 당국자들은 물론 1990년대 이후 대북 외교에 관여했던 모든 인물들, 미 행정부 내 여러 부처들, 한·일 등 동맹들을 상대로 의견을 광범위하게 들었다고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는 오바마 행정부 때처럼 ‘전략적 인내’라는 이름 아래 북핵 문제를 방치할 수도, 트럼프 행정부 시절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실패했던 것처럼 ‘빅딜’을 통해 북핵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는 방법을 택할 수도 없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이 두개의 극단을 절충하는 단계적 접근일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과정에서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 행정부 시절 북한과 오랜 기간 협상했던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부장관으로부터 조언을 받았다고 밝혔다. 비건 전 부장관은 2019년 2월 말 하노이 회담을 앞두고 북한이 주장해 온 단계적 해법을 수용하려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볼턴 전 보좌관 등의 막판 뒤집기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미국이 재검토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순간, 문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다시 한번 강한 어조로 공개했다. 문 대통령은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등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대북 정책 재검토의 최종안을 보고하기 직전인 지난 21일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이 단계적 접근법을 택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이 인터뷰가 실제 미국 정부의 의사 결정에 얼만큼 영향을 끼쳤는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미국 정부의 최종 결론에 한국의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은 사실이다. .
하지만, 북-미 대화로 향해 가는 앞길은 여전히 첩첩산중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예상보다 유연한 대북 접근법을 택했지만, 의미 있는 대화가 시작될 여건이 성숙돼 있지 않다. 지난 2019년 2월 말 ‘하노이 실패’ 이후 북은 자력갱생을 외치며, 한-미 연합훈련 중지, 첨단 전략자산 도입 금지 등 ‘체제 보장’과 관련된 근본적 요구를 쏟아내는 중이다. 그러나 미국은 한-미 연합훈련은 계속 실시한다는 입장(3월22일 백악관 고위 당국자)이고, 한국 정부 역시 북한이 싫어하는 F-35 등 첨단 전략자산의 도입을 미룰 생각이 없다.
결국, 북한은 미국이 완전한 재검토 결과를 공개할 때까지 상황을 관망하면서, 당분간 자신들이 설정해 놓은 자력갱생의 길을 갈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전략적 도발을 걸어올 가능성도 있다. 미 당국자도 <워싱턴포스트> 인터뷰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새 대북 전략이 “핵 도발에 대한 북한의 단기적 계산법(calculus)을 바꿀 것으로 보진 않는다”고 전망했다. 길윤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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