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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찾아갔던 분에게 오랜만에 방문 의뢰 연락을 받았다. 미현(가명) 어르신은 1년 전 서너차례 찾아뵌 이후 방문하지 못했다. 치매 증상으로 어두운 방 침대에 꼼짝하지 않고 누워 그 누구와도 어떤 소통을 허용하지 않았다. 뭔가 대화도 나누고 진찰도 해봐야 증상을 알 텐데 어르신은 방을 점거하고 문 앞을 넘지 못하도록 엄포를 놓았다. 문밖에서 질문을 드리고 겨우 허락을 얻어 잠시 가까이 가서 진찰하였다.
어르신도 걱정이지만 돌보는 가족들도 난처한 상황이다. 가족들이 식사를 챙겨드려도 뭔가 잘못된 음식이라며 믿지를 않았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돌봄의 손길을 거부했다. 나는 몇차례 찾아뵙고 요양 서비스도 연계하고 약도 드렸지만, 어르신은 끝내 도우려는 낯선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약도 드시지 않았다. 드시지 않은 약을 계속 처방하니 나도 보호자들도 민망하여 자연스레 발길이 끊겼다. 나 역시 전혀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선생님. 할머니가 가래가 있고 기침이 심한데 봐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1년이 지나고 가족들은 내게 다시 연락을 주셨다. 부끄럽지만 나 역시 오랜만의 연락이 반가웠다. 나라는 부족한 의사를 기억해주었을뿐더러 ‘잘 지내고 계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잘 지내신 걸까?
방문을 요청한 손자분은 업무 도중 잠시 시간이 생기는 오후 3시30분에 찾아와달라고 했다. 이전 일정이 일찍 끝난 나는 30분 정도 먼저 도착해 빌라 주위를 서성이며 손자분이 오셨나 하고 살피다가, 누군가 있겠지 생각하며 현관문을 두드렸다. 나를 맞아준 건 다른 보호자였다. 항상 연락하던 손자분의 어머니인 걸로 보인다. 이전 방문 때 만났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저 방문 의사입니다. 지난번에 몇번 찾아뵈었는데.”
“그때 오셨던 것 같네요.”
“기침, 가래가 심하다고 하던데 어르신 좀 뵐 수 있을까요?”
“그러세요.”
손자분 어머니의 다소 퉁명스러운 태도에 나는 잠시 당황했다. 혼이 쏙 빠진 말투였다. 역시 손자분을 좀 더 기다릴 걸 그랬나 생각하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만난 미현 어르신은 1년 전과 정반대의 상황을 보인다. 방을 점거하고 누워 있지 않고 온 집 안을 헤집고 다니며 어질러놓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도 말을 걸고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묻기도 하고 자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이야기한다. 일단 온 목적은 기침, 가래였기 때문에 그 부분을 확인했다. 아마도 코로나 상황이기도 해서 가족들이 걱정했던 모양이다. 증상은 나쁘지 않고 미리 진해 거담제 약들을 준비해놓아서 크게 문제는 없어 보였다. 아직 손자분이 오지 않아 일단 소견을 말씀드리려고 문을 열어준 어머니에게 대화를 청했다. 나와의 대화를 피하는 듯한 인상이라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망설였다. 어르신이 잠시 방으로 들어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 손자분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어르신 상황이 많이 달라졌네요?”
“지금은 밤새 돌아다니느라 잠을 못 자요. 새벽에도 우리를 깨워서 일상생활이 어려워요. 방문을 잠그고 잘 수밖에 없어요.”
혼이 쏙 빠진 말투와 퀭한 얼굴. 간병 부담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수면 부족이 짐작된다. 아픈 이를 돌보느라 잠을 못 자고 결국엔 보호자 또한 시들어간다. 어르신 눈을 겨우 피해 내게 한참이나 어려움을 토로하신다. 최선을 다해 듣고 나름 위로의 말씀을 건넸다. 약 용량을 늘려서 증상을 조절해야 함을 말씀드렸다. 조심스럽게 단기간 시설에 입소도 고려하시라 말씀드렸다. 어르신이 손자와 유일하게 소통이 되어 손자 말만 겨우 듣는데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렵다고도 말씀하셨다.
나와 비슷한 또래인 손자분은 30분쯤 더 지나고 도착했다. 얘기를 듣고 나니 조모를 돌보며 충분한 수면도 어려운 상태에서 업무를 하는 일이 과중해 보였다. 호흡기 증상에 대해 상의하고 손자분 어머니께 설명해드린 것과 비슷하게 약에 대한 부분 그리고 시설 입소까지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손자분은 진중한 표정으로 내 의견을 경청했다.
어르신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땐 어떤 상황일까? 무능한 의사인 나를 새삼 발견한다. 사실 대부분의 간병 상황에서 별 도움이 안 된다.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라기보다는 돌보는 어려움에서 오는 위기이기 때문이다. 돌봄은 전적으로 가족 혹은 돌봄 노동자들에게 맡겨져 있다. 그들의 수고를 외면한 채 우리 사회는 돌보는 일을 소홀히 다뤄왔다. 치료할 수 있는 질병을 치료하고 죽음을 늦추고 막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편안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도록 돌보는 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루를 더 연명하기 위해 너무 애를 쓰기보단 하루를 살더라도 환자 본인뿐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작은 만족을 느끼는 것이 건강의 본질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질병과 손상 그리고 노화의 경계가 흐릿해 치료보다는 돌봄이 시급한 상황을 자주 마주한다. 건강을 다루는 데 치료에만 큰 권위를 부여해온 관행도 조금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돌봄과 치료는 나눠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인 점도 맞다. 저출생, 고령화가 위기라고 하는데 정확히는 돌봄이 위기이다. 앞으로만 가라고 하는데 앞을 생각할 때는 지나고 뒤를 돌아보는 일이 더없이 중요한 시점이다. 돌보는 마음이 위기를 헤쳐나갈 지혜이다.
미현 어르신과 가족의 돌봄 경험이 기억하기 싫은 절망의 경험만이 아니길 바라본다. 아픈 이뿐 아니라 아픈 이를 돌보는 분들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아픈 이와 돌보는 이들 모두에게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역할이 나에게 주어지길 바라본다.
<끝>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님과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찾아가는 의사. 남의 집을 제집 드나들듯이 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꿈도 계획도 없다. 내 집도 남이 드나들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방문을 허락하는 이들이 고맙고, 그 고마운 이들과 오랫동안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