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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의료·건강

“죽을 만큼 아파야 가는 병원인데, 노숙인에겐 멀기만 해요”

등록 2022-04-06 15:39수정 2022-05-02 15:05

노숙인 의료급여 까다롭고 특정 병원만 이용 가능
국가 지정 병·의원 시설 전국 76곳에 불과
일부 지정 병원은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바뀌기도
홈리스행동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해야”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사무실 인근에서 시민단체 ‘홈리스행동’이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홈리스행동 제공.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사무실 인근에서 시민단체 ‘홈리스행동’이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홈리스행동 제공.

2009년부터 10년간 노숙 생활을 했던 김아무개씨는 신경성 위장병을 오랫동안 앓았다. 내과 진료를 보고 약을 타기 위해 김씨는 한 달에 한 번씩 의료 급여를 신청해야 했다. 거리 노숙인의 1종 의료 급여는 기간이 한 달만 인정돼, 매달 갱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의료급여 수급자가 돼도 병원에 가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다. 보건소를 제외하면 2021년 12월 기준 국가가 지정한 병·의원급 노숙인 진료시설이 76곳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매번 병원을 찾기가 어렵다 보니 김씨는 한 달 치 약을 타놓고 속이 아플 때마다 먹었다. 의사를 만나 증상을 말하고 진료를 보고 싶었지만, 김씨에게 병원은 멀고 불편한 곳이었다.

시민단체 ‘홈리스행동’은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사무실 인근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를 촉구했다.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란 노숙인 1종 의료급여 수급자가 지자체가 정한 진료기관에서만 의료급여를 신청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모든 의료급여 수급자 유형 중 진료시설을 지정하는 유형은 ‘노숙인 등’이 유일하다. 1종 의료급여를 받는 노숙인 수도 2015년 903명에서 2020년 315명으로 점점 줄고 있는데, 조건이 까다롭기 때문이다. 노숙이 ‘지속적으로 3개월 이상 유지’되어야 하고, ‘국민건강보험에 가입되어 있지 않거나 6개월 이상 체납’되어 있어야 한다. 그 결과 3천명 정도로 추정되는 노숙인 규모에 비해 수급자는 10% 수준에 불과하다.

안형진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작은 병 키워서, 죽을 만큼 아프게 되면 그때서야 아픈 몸 이끌고 먼 길 걷는 것이 지금껏 홈리스 당사자들의 현실”이라며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 폐지와 노숙인 1종 의료급여 확대라는 상식적 요구에 대해 신속한 응답을 바란다”고 설명했다. 김도희 사회복지공익법센터 변호사는 “대한민국에서 아플 때 병원 가는 게 이렇게나 힘든 일이어야 하는가”라며 “명백히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한 차별이며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형진 홈리스행동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홈리스행동 제공.
안형진 홈리스행동 활동가가 발언하고 있다. 홈리스행동 제공.

앞서 국가인권위원회도 지난 1월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제도가 노숙인의 건강권과 의료접근권을 침해한다며 전향적 폐지를 권고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달 “노숙인 진료시설을 확대하겠다”며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 등에 관한 고시’를 제정했다. 하지만 해당 고시는 1년간만 한시적으로 운영되며, 4단계 감염병 위기 경보 중 ‘주의’ 단계 이상이 발령돼야 하고, 요양병원은 제외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안 활동가는 “근본적으로 바뀐 게 없다”고 비판했다.

노숙인 진료시설 지정 병원이 코로나 전담병원으로 운영되며 병원 이용에 어려움을 겪은 노숙인도 많다. 정성철 빈곤사회연대 활동가는 “지정 병원을 이용하기 위해 2시간을 걸어갔는데, 병원 이용할 수 없으니 돌아가라는 말을 듣고 다시 2시간을 걸어 서울역으로 그냥 돌아온 사람도 있다”며 “다리가 아파 병원을 이용하려 했던 건데, 탱탱 부은 다리를 이끌고 4시간을 왕복했다”고 말했다. 정 활동가는 “그렇게 차별받았던 경험은 치료를 단념하게 만들었다”며 “스스로 건강을 해칠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홈리스행동 회원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측에 ‘홈리스 의료접근성 강화를 위한 요구서한’을 전달하고 있다. 장현은 기자.
홈리스행동 회원이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측에 ‘홈리스 의료접근성 강화를 위한 요구서한’을 전달하고 있다. 장현은 기자.

이날 기자회견 말미 홈리스행동은 인수위원회에 ‘홈리스 의료접근성 강화를 위한 요구서한’을 전달했다. 연대발언에 나선 김성연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사무국장은 “당선인이 어느 사람을 향해 누구를 바라보며 정책을 만들어야 되는지를 고민하길 바란다”며 “지원이 필요 없는 사람을 향해 정책을 만드는 게 아니라 더 돌아봐야 하는 사람을 돌아보는 역할임을 각성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현은 기자 mix@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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