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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06 11:00 수정 : 2018.05.06 14:51

지난달 20일 서울 사당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녹음 중인 정신과 전문의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희우씨, 허규형씨, 오동훈씨, 손정현씨, 김지용씨.

[토요판] 인터뷰
팟캐스트 ‘뇌부자들’ 진행하는 정신과 의사들

지난달 20일 서울 사당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녹음 중인 정신과 전문의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희우씨, 허규형씨, 오동훈씨, 손정현씨, 김지용씨.

▶10년지기인 정신과 전문의 다섯명이 뭉쳐 1년 전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 탓에 마음의 병을 키우는 이들에게 정신과 문턱을 낮춰주고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서다. 진심 어린 공감과 냉철한 분석으로 잔잔한 인기를 얻고 있는 이들의 방송 현장을 찾아 이들이 건네는 조언을 들어봤다.

“어느날 20대 초반의 젊은 환자가 응급실에 실려 왔어요.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주변 사람들과 전혀 의사소통이 안 될 정도로 심각한 상태의 조현병 환자였어요. 누가 봐도 당장 입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는데 아버지가 극구 반대하고 나서더라고요. 심지어 그 아버지의 직업이 의사였는데도…. 겨우겨우 설득해서 입원은 시켰는데 조금 상태가 나아지자 바로 퇴원해야 한다고 우겼어요. 계속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는데도 내내 방어적인 태도였어요.”

“20대 후반의 젊은 여성이 남자친구와 함께 응급실에 왔어요. 심각한 수준의 우울증으로 입원을 권유했는데 본인도, 남자친구도 모두 거절하면서 퇴원한 뒤 1주일 뒤에 (건물에서) 뛰어내려서 양쪽 다리, 골반 뼈가 다 부러졌어요.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가족들의 신앙이 독실할수록 문제가 될 수도 있어요. 정신질환이 발병했을 때 병원을 찾지 않고 기도원 같은 데를 찾아다니다 시간을 허비하죠. 정신질환도 ‘골든타임’이 있어요. 치료 않고 계속 방치하면 뇌 신경계가 망가져서 되돌리기 힘들게 돼요. 정신질환이란 결국 신경전달물질 등의 문제로 생물학적인 문제가 발생한 것인데, 계속 의지가 부족하다, 마음이 약해서 그렇다고 하면서 환자를 책망하는 경우가 많아요.”

김지용(35)·손정현(33)·오동훈(33)·윤희우(33)·허규형(34). 지난달 20일 팟캐스트 방송 ‘뇌부자들’을 녹음하러 서울 사당동의 한 스튜디오에 모인 정신건강의학과(정신과) 전문의 다섯명을 만났다. 왜 팟캐스트를 시작했냐는 질문이 나오자마자 절절한 경험을 쏟아냈다. 같은 대학에서 공부하고 함께 수련의를 지낸 이들은 여러 환자의 사례를 공유하면서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의 벽, 정신과의 문턱을 낮추는 일이 급선무’라는 데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됐다고 한다. 정확한 정보를 솔직하고 친절하게 제공할 방법을 찾던 와중에, 게임·유튜브 등 평소 ‘뉴미디어’에 밝은 허규형이 팟캐스트 방송을 하자고 동을 떴고 이내 뭉쳤다.

첫 방송땐 사연 한통 없어…지금은 감당 힘들어

지난해 3월18일 ‘뇌부자들’ 인트로 방송을 내보낼 때만 해도 잘될지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이들은 2주에 한번씩 스튜디오에서 만나 녹음을 하고 1부와 2부로 나눠 일주일 간격으로 업로드한다. 1부는 정신건강의학과 ‘내부자’들의 시선으로 정신질환에 대한 전문적 정보와 진료 현장에서의 경험, 에피소드를 나누는 ‘정비소’(정신과의 비밀을 소개합니다) 코너이고, 2부는 청취자들의 사연을 소개하면서 이를 심리적으로 분석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첫 방송 때는 사연이 하나도 오지 않아 ‘술 먹으면 주사를 부리는 룸메이트를 둔 지인’ 이야기를 해야 했지만, 점차 사연들이 수북이 쌓여갔고 폭발적인 반응이 쏟아졌다. 몇달 전까지만 해도 팟캐스트에서 다루지 않은 사연에도 꼼꼼한 답변을 보냈지만, 이젠 그 분량이 너무 많아 감당하기 힘들 정도다. 2017년 출시작 가운데 아이튠스 최다 다운로드 수 6위를 기록했고 각종 방송 출연 제의도 들어왔다. 아이가 어린 김지용·오동훈·허규형씨는 소아정신과 전문의 손인정씨와 지난해 8월부터 육아 문제를 다루는 네이버 오디오 클립 ‘뇌섹맘 클리닉’을 시작했다.

팟캐스트 ‘뇌부자들’ 진행자들이 펴낸 책 <어쩐지, 도망치고 싶더라니>.
최근엔 가상 환자들을 상대로 한 상담 진료기인 <어쩐지, 도망치고 싶더라니>(아르테)를 펴냈다. ‘인정 욕구’가 너무 강해 일을 좋아하면서도 정작 집중하지 못하는 시나리오 작가, 친정 엄마에 대한 분노로 아이에게 무의식적인 폭력을 가하는 젊은 엄마, 과도한 자기애 탓에 공황발작을 일으킨 취업준비생, 간헐적 폭식에 시달리는 웹툰 작가, 강박적 성격을 지닌 성형외과 의사 등 다섯명의 캐릭터를 상정하고 이들의 행동 패턴에 어떤 방어기제가 자리잡고 있는지, 왜 이들이 자신의 문제를 직시하지 못하는지 전이·투사·전치·반동형성·동일시·정신화·격리 등 심리학의 틀을 빌려 상세하게 분석한다.

‘뇌부자들’이 사람들의 귀를 사로잡고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정신과 전문의들이 진행한다는 기본적인 신뢰 자산에 더해 이들의 진심 어린 공감과 냉철한 분석 때문이다. 설득력 있는 조곤조곤한 말투, 10년지기 다섯명이 이뤄내는 ‘아웅다웅 케미’도 한몫한다. 잠 안 오는 밤 뇌부자들을 듣다보면, 가벼운 미소를 짓다가 어느새 마음이 편해지며 스르르 잠에 빠져들게 된다.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 낮추고파”
정신과 전문의 5명 ‘뇌부자들’ 방송
따뜻한 공감, 냉철한 분석으로 인기
“환자 얘기 풀어내면 진짜 답 나와”

부모님에 순종 뒤 방황하는 학생에
“흘려보낸 시간 너무 자책 말라”
학력·남자친구 꾸며내는 여성엔
“생존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위로

가령 언니와 동생의 학비를 감당하기 어려우니 전문대에 가서 빨리 취업 준비를 하라는 부모님의 말에 순종했지만 4년제 대학의 막연한 꿈을 품은 채 우울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학생이 도움을 요청한 사례를 보자. 다섯명의 진행자는 공감·이해·분석·조언 등의 역할을 나눠 맡는다. 의대가 적성에 맞지 않아 유급을 하고 한때 전과를 생각했던 경험을 풀어놓으며 ‘인생의 선배’다운 접근을 하면서도(김지용), 시험 준비에 집중하지 못하고 회피하는 심리를 진단한다(허규형). 부모님이 고맙고 미안한 마음도 있지만 원망스럽기도 한 양가감정이 왜 생겨났는지도 짚는다. “흘려보낸 시간을 너무 자책하지 말라”(손정현)며 따듯한 위로를 건네지만 “모든 방황이 괜찮은 건 아니다”(오동훈)라는 따끔한 조언도 잊지 않는다. “길을 가다 목적지를 바꾸려고 하면, 달려온 시간이 아까워서 목적지가 분명해질 때까지 제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정말 아까운 것은 달려온 시간이 아니라 제자리에 멈춰 있던 시간이다. 눈앞의 과제에 집중하면서 방향을 모색하라고 말하고 싶다.”(오동훈)

‘근사한 남자친구’, ‘그럴듯한 학력’을 가짜로 꾸며내며 거짓말만 늘어가는 한 여성의 사연을 소개할 때는, 손상된 유년기, 낮은 자존감을 감추려는 ‘연극성 성격장애’일 가능성을 짚어내면서 그럼에도 이 여성이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노력을 언급하며 “정말 괜찮은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격려한다.

“가진 게 별로 없어 용기 냈어요”

지난해말 자신의 주치의에 대한 원망을 담은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샤이니 종현의 죽음은 이들에게 힘겨운 과제였지만, 정신과 의사의 어려움과 한계를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청취자들의 이해를 구했다. “의사가 환자에게 좀더 공감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과 함께 위급한 상황에서도 편견을 이기기엔 너무 유명하기 때문에 연예인 입원이 무척 어려운 현실을 말했다.

젊기 때문일까. 솔직함은 이들의 무기다. 정신과 약은 모두 부작용이 심하다는 통념을 반박하기 위해 김지용씨가 대학 시절 제약회사에서 실시한 신약 임상시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경험까지 털어놓는 데 이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는 비싼 학비를 벌기 위해 조현병·조울증 치료제로 개발된 쿠에티아핀 100㎎을 투약받고 1박2일 동안 혈중농도를 체크하는 실험에 참가했다. “나는 정신 못 차리고 내내 잤지만 다른 참가자는 이 돈으로 뭘 살까 궁리하며 내내 인터넷 검색을 하더라. 사람마다 약에 반응하는 것이 다 다르다. 신중한 처방이 더 중요하다.”(김지용)

팟캐스트 ‘뇌부자들’ 멤버들. (왼쪽부터) 손정현씨, 김지용씨, 허규형씨, 오동훈씨.(윤희우씨는 개인 사정으로 촬영에 참여하지 못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팟캐스트라는 색다른 시도를 시작하면서 다른 동료 의사들의 반응은 걱정스럽지 않았을까? 뇌부자들은 “별로 가진 게 없어서” ‘내부자’가 됐다고 했다.

“의사 사회가 본래 보수적인 집단이라 안 좋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정신과의 경우엔 유명하지 않은 의사라도, 큰 상급 병원이 아니라도 더 좋은 치료를 받을 수 있거든요. 이름 높은 의사 경우엔 상당히 많은 환자를 봐야 하기 때문에 의사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은 답은 환자 본인이 어느 정도 갖고 있어요. 환자 얘기를 충분히 풀어내면서 진짜 답이 발견될 수 있습니다. 보내오는 사연에 우리가 충분히 시간을 투자하고 열심히 생각하고 의견을 나눈다면, 높은 교수님들이 비난할 만큼 우리가 잘못하지는 않을 거 같아요. 어쩌면 우리는 잃을 게 별로 없어서 용기를 낸 것도 같아요. 하하하.”

글·사진 이주현 기자 edig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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