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체의 오른쪽 트림 러기지를 맡고 있는 정경우(오른쪽)씨는 정규직이고, 왼쪽을 담당하는 김만진(왼쪽)씨는 사내하청 노동자다. 서로 작업하기 편하도록 두대의 차를 나눠서 고정핀 6개씩을 각각 좌우에 꽂는다. 김씨 친구 중에는 정규직도 있다. 김씨는 “가끔 같이 술도 먹는데 자연스레 비교될 수밖에 없지 않나. 일부러 임금이나 하는 일 같은 거 신경 안 쓰려고 한다”고 말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정규직 형님은 결혼했고
산악자전거 등 여가생활을 즐긴다
비정규직 아우는 미혼이고
“취미 같은 건 갖기 어렵다”
지난달 20일 희망버스 오던 날 아우는 회사·경찰과 맞서 싸웠다
형님은 그 모습이 안쓰러워
‘좀 쉽게 가면 안되나’ 생각했다 현대차에는 노사간 골만 있지 않다. 노사 대립이라는 이랑에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파인 고랑이 흐른다. 그런데도 경우·만진씨는 단짝이다. 1978년 울산 울주군에서 태어나 인문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정씨는 체육대학을 지망했으나 낙방한 뒤 전문대를 다니다 관뒀다. 지금은 정규직이지만 애초 정씨도 현대차 사내하청업체인 ㅅ기업에 입사해 현대와 인연을 맺었다. 친구가 다니던 회사였다. 한달 대엿새 특근을 해야 120만원가량 손에 쥘 수 있었다. 2000년 봄이었다. 정씨는 2002년 10월 정규직이 됐다. 당시 현대차는 사내하청 경력자에게 가산점을 줘 대규모 신규채용을 했다. “지금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이 심했다. 사내하청 월급도 정규직 초임의 3분의 1 수준을 좀 넘었고. 정규직이 돼야겠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고 정씨가 말했다. 2003년까지 현대차는 사내하청 노동자 중에서도 정규 생산직을 뽑았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채용은 이후 10년 가까이 볼 수 없었다. 정씨는 2000년대 정규직으로 가는 마지막 열차를 올라탄 셈이다. 그는 “지금도 정규직이 기피하는 힘든 공정은 모두 비정규직이 한다.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정규직 되긴 더 힘들어졌다. 그냥 안쓰럽다”고 말했다. 비정규직 김씨는 정씨보다 2년 늦게 태어났다. 전문대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는데 이후 전공을 활용한 적은 없다. 대학생 때도 아르바이트로 바빴다. 페인트 공장에서 드럼통을 옮겼고 물류회사에서 배차를 담당하기도 했다. 잠시 일거리가 끊긴 2005년 지인이 현대차 협력사를 소개해줬다. “그냥 현대차 안에 있는 업체라고만 들었다. 무슨 일 하는지도 정확히 몰랐으니까. 그땐 어렸다.” 김씨의 얘기다. 20대 김씨에겐 ‘형님’ 정씨처럼 현대차 정규직 취업의 기회 자체가 거의 없었다. 2007년 7월 개정되기 전 파견법의 고용의제 조항(파견 2년이 넘으면 원청에 고용된 것으로 간주)을 적용하면 그도 정규직이 될 수 있다. 2010년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씨가 대법원 판결을 받기 전까진 이런 사실도 알지 못했다. 김씨의 회사는 이후 사장과 상호가 한차례 바뀌었고, 또 폐업하면서 다른 협력사로 통합됐다. 자신을 고용한 협력사가 언제 바뀌고 사라졌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그때마다 근로계약을 새로 맺었으나, 직원들은 그대로였고 신분도 변함없으니 무의미했다. 오른쪽 ‘트림 러기지’를 맡는 정씨는 정규직으로 채용된 이듬해 결혼했다. “아내도 정규직이 됐다고 많이 좋아했어요. 지금 급여는 세금을 떼고 7000만원가량 받습니다.” 산악자전거를 즐겨 타고 최근 골프를 배우기 시작했다. 왼쪽 트림 러기지 김씨는 아직 미혼이다. 홀어머니와 산다. 지난해 세전 4200만원 남짓 받았다. “우리 집에서 내가 유일한 수입원이라 체감 임금은 더 낮다.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사는 기분”이라고 김씨는 말했다. 취미를 묻자 “그런 거 갖기 어렵다”며 서둘러 말을 잘랐다. 두배가량 차이나는 급여만이 아니다. 명절 떡값, 공장의 휴게공간, 공장 출입 명찰의 종류도 둘을 가른다. 자존감의 크기도 전혀 다르다. 능력이 이들의 ‘계급’을 나눈 건 아니다. 세계 경기의 부침에 따라 비정규직 노동자는 먼저 죽었다 늦게 되산다. ‘인간 쇼바’라는 말이 나오는 까닭이다. 자본은 가장 늦게 죽고, 가장 먼저 일어난다. 현대차는 당장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화하라’는 3년 전 대법원 판결도 모르쇠한다. 판결의 근거가 된 고용의제 조항에 대해선 헌법소원도 제기했다.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는 문제가 장기화할수록 더 고립되는 형국이다. 지난달 20일 ‘희망버스’와 비정규직지회가 ‘현대차’와 충돌하던 때, 정규직 노조(금속노조 현대차지부)는 자체 행사를 인근에서 개최했다. 일종의 대의원 단합대회였다. 정규직 노조원 상당수는 특근을 했다.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이날 현대차와 몸으로, 정규직과는 마음으로 부딪혀야 했다. 협력사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비운 자리에 다른 사내하청 노동자를 투입했다. 김씨는 “말이 정규직 노조와의 연대지 비정규지회에선 그걸 느끼기 쉽지 않다. 금속노조 주최 집회에 가면 뒤에선 비정규직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정규직지부는 발언만 하고 빠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규직 정씨는 “동생들처럼 내가 마음이 안 단단한지, 좀 쉽게 가면 안 되나 생각도 한다. 회사가 다시 비정규직을 상대로 정규직을 채용하고 있으니 지원서를 내면 좋겠다”고 말했다. 희망버스 폭력이 발생한 날 “다치지 않았다”는 김씨와 “(김씨 등이) 다칠까봐 걱정”이라는 정씨는 단짝이다. 정씨와 김씨에게 애초부터 실력이나 학력차 따위는 없다. 시대와 정부, 그리고 현대차가 갈라놓은 ‘운명’이 있을 뿐이다. 단짝의 의지만으로는 건널 수 없는 불화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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