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영 한국노총 위원장과 최저임금위원회 노동자 위원들이 지난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열린 `최저임금 1만원 즉각실현을 위한 긴급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내년 최저임금 결정 시한을 코앞에 두고 최저임금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을과 을의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 영세업체의 어려움이 최저임금 때문만이 아닌데도, 저임금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들의 갈등만 부각되는 양상이다. 이들이 어려움을 겪는 배경에 대기업의 중소영세기업·소상인 수탈구조가 자리 잡고 있는 만큼, 정부가 경제구조 개혁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편의점 업체 가맹점주 3만명으로 구성된 전국편의점가맹점협회는 12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내년 최저임금 동결을 위해 동맹휴업을 불사하겠다”고 나섰다. 이들은 “편의점 점주들은 인건비 압박을 견딜 수 없다. 내년도 최저임금의 대폭 인상을 추진하려는 계획을 철회하고 최저임금을 동결하라”고 촉구하며, 최저임금의 업종별 차등화와 영세·중소 가맹점의 신용카드 수수료 우대 구간 확대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최저임금 대폭 인상 때는 야간 판매가격을 5~10% 올려 받고, 종량제 봉투 판매와 교통카드 충전, 공병 매입 등 공공기능 축소 및 거부 등을 검토하겠다는 카드도 꺼냈다.
소상공인연합회도 이날 같은 장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5인 미만 사업장 등에 대한 최저임금 차등화 방안이 무산된 만큼 ‘소상공인 모라토리엄’을 진행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노사 간 합의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법정 최저임금 거부’를 예고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중소영세사업자 등의 최저임금 인상 반발을 해결하려면, 근본적으로 대기업의 ‘쥐어짜기’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중소기업은 원청 대기업의 납품단가 인하 압력 등에 가장 큰 위협을 느끼고, 편의점의 어려움 역시 대기업인 프랜차이즈 본사의 횡포에 더 많은 타격을 입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최저임금위원회가 본격적인 심의에 앞서 지난달 진행한 현장방문 결과에서도 잘 드러난다.
최저임금위원회가 최근 공개한 ‘2018년 현장방문 결과보고서’를 보면, 위원들이 만난 중소기업 관계자들은 “납품단가·용역대금만 올라도 최저임금 인상은 버틸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전북 익산의 한 기계시공업체는 올해 최저임금이 인상된 뒤 원청에 보낼 ‘납품단가 인상 요청 공문’을 준비했지만, 도리어 매출 1조원이 넘는 원청으로부터 ‘납품단가 인하 요청’ 공문을 받았다고 한다. 직원 10명의 이 업체 본부장은 “못한다고 하면 우리 것을 빼서 다른 곳으로 준다. 정책적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인천에서 직원 30여명 규모의 가구 납품업체를 운영하는 박아무개 대표도 “1억원짜리 주문을 받아도 (단가가 낮아) 2천만원 손해가 나지만, 놀고 있으면 인건비로 3천만원이 손해라서 작업을 한다”며 “최저임금이 안 오르면 가장 좋지만 (납품단가가 올라) 매출이 오르면 최저임금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사전 설문에서 ‘적정한 내년 최저임금’을 8500원으로 답했다.
임금 결정권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부산에서 청소서비스 업체를 운영하는 김아무개 대표는 “임금 결정권은 (용역을 쓰는) 아파트가 갖고 있는데, 관리비를 안 올리려고 경비원들 휴게시간을 한계치까지 늘렸다”고 말했다. 이 업체는 휴게시간을 마구잡이로 늘리는 아파트 쪽의 ‘갑질’ 탓에 재계약을 포기하는 일이 최근 5번이나 있었다고 했다.
한 편의점주협의회 자문위원은 “가맹 본사에 내는 (가맹비) 비율이 조금 줄었지만 점포 수가 증가하며 점포당 매출이 줄어 점주 수입은 더 줄었다”고 호소했다. 최저임금 인상이 가맹비 인하로 상쇄되는 듯하지만, 실제론 대기업 본사의 무분별한 가맹점 확대 탓에 실질적인 타격을 받는다는 지적이다.
정부와 국회가 갈등을 방치하고 있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경제구조를 바로잡는 개혁을 뒤로 미루다 보니 ‘을과 을 간 싸움’만 커졌다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최저임금 16.4% 인상 결정 뒤 ‘소상공인·영세중소기업 지원대책’ 94개를 내놓았는데 이 중 20개는 입법 과정도 밟지 못한 채 시행이 미뤄지고 있다. 상인들은 ‘최저임금보다 임대료 인상이 더 문제’라고 입을 모으고 있지만, 임차인의 계약갱신 청구기간을 5년에서 10년으로 연장하는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은 아직 국회 상임위원회에서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가맹본부가 가맹점의 법 위반 행위 신고에 보복할 수 없도록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는 ‘가맹사업법 개정안’도 국회에 계류 중이다.
김남근 참여연대 경제금융센터 변호사는 “하청·협력업체의 원가구조를 파악해 대기업이 최저임금 인상 부담을 나눠서 져야 한다. 공정거래위원회·중소벤처기업부 등이 ‘납품단가 조정협의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감독권을 적극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윤윤규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정부가 내세운 포용적 경제는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원-하청 계약이나 프랜차이즈 계약, 임차료 계약을 공정하게 만드는 제도적 개혁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지혜 이정국 정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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