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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모든걸 사회 탓으로 돌릴 것인가?

등록 2006-12-24 19:40

“술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것이 아니라 사회가 권해 마셨다”는 등장인물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억압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전혀 구현될 수 없는 것인가? 사진은 서울의 한 거리에서 만취한 채 잠이 든 노숙자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술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것이 아니라 사회가 권해 마셨다”는 등장인물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억압된 사회적 환경 속에서 전혀 구현될 수 없는 것인가? 사진은 서울의 한 거리에서 만취한 채 잠이 든 노숙자들의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문학속 철학산책 /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를 통해 본 ‘자유의지’의 의미

1921년 <개벽>지에 발표된 현진건의 <술 권하는 사회>는 사실주의적 기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문학에 근대적 의미에서 단편소설의 형식을 확고히 한 수작이다. 그런데 바로 이 뛰어난 사실주의 작품에서 주인공은 “이 사회라는 것이 내게 술을 권한다오”라는 한탄을 한다. 사회가 개인에게 술을 권하다니, 도대체 무슨 말일까?

소설은 새벽 한 시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바느질을 하던 아내가 바늘에 그만 손가락을 찔려 아파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남편은 결혼 직후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내는 오랜 세월을 커다란 기대감을 가지고 남편을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돌아온 남편은 항상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고, 낮에는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보내다가 밤이면 나가 술을 마시고 다녔다. 당연히 돈을 벌어 오기는커녕 집안의 돈을 쓰기만 했다.

새벽 두 시가 지나서야, 남편이 만취 상태로 돌아온다. 남편의 취한 모습에 아내는 “원 참 누가 술을 이처럼 권했노?”라며 짜증을 낸다. 그러자 남편은 “내가 술이 먹고 싶어서 먹었단 말이요?”라고 대들더니 사회가 술을 권한다고 외치며 다시 집을 나가버린다. 그러자 아내는 절망적인 어조로 “그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라고 탄식하면서 소설이 끝난다.

이 작품은 일제 강점기 시대의 사회적 현실에 절망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매국적 친일을 제외하면 할 만한 일거리가 없었던 당시 사회적 상황을 감안한다면, 사회가 술을 권한다는 주인공의 말을 일단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자! 그렇다고 해도 한 개인이 술을 마시는 이유를 오직 사회의 탓만으로 돌릴 수 있을까? 그건 술꾼들이 으레 떠벌리는 공연한 핑계가 아닐까?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학문적 주장이 있다.

캐나다의 심리학자 알렉산더 박사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실시한 ‘쥐 공원 실험’이 그것이다. 그는 16마리의 쥐들을 비좁고 격리된 우리 안에 각각 넣고, 같은 수의 다른 쥐들을 ‘쥐 공원’에 풀어놓았다. ‘쥐 공원’이란 연구자들이 만든 약 200제곱피트 크기의 쾌적한 쥐 거주지였다. 여기에는 알맞은 온도와 놀이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암컷과 수컷 모두를 데려다 풀어놓았기 때문에 짝짓기나 새끼를 낳는 데도 좋은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다음 양쪽 모두에 마약 성분인 모르핀을 탄 물과 보통 물을 넣어주었다. 모르핀을 탄 물에는 쥐들이 싫어하는 쓴 맛을 없애는 당분도 섞었다. 그리고 관찰했더니, 좁고 격리된 우리에 갇힌 쥐들은 처음부터 모르핀이 든 단물을 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중독이 되었다. 하지만 ‘쥐 공원’에 풀어놓은 쥐들은 모르핀이 든 단물을 거부하고 보통 물만을 마셨다. 연구자들이 당분을 더 섞어 아무리 달게 만들어도 소용이 없었다. 간혹 일부 쥐들이 모르핀이 든 물을 마신 적도 있지만, 그들마저도 보통 물을 더 좋아했다. 그 결과 우리 안의 쥐가 ‘쥐 공원’의 쥐보다 모르핀이 든 물을 최대 16배나 더 마셨다.


이 연구는 쥐들이 쾌적한 환경에 있을 때에는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하는 약물을 피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바꾸어 말하면 정상적인 생활을 방해받을 때, 즉 환경적 억압이 있을 때에만 약물을 가까이 한다는 것이다. 알렉산더 박사는 이 실험 결과를 바탕으로 인간의 담배나 술, 또는 마약에 의한 중독에도 사회적 억압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주장을 <술 권하는 사회>와 연관시켜 생각해 본다면, 술을 먹고 싶어서 먹은 것이 아니라 사회가 권해 마셨다는 남편의 말에는 분명 일리가 있다. 그것이 주정뱅이의 궁상스러운 변명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입증된 타당한 변론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말이 전적으로 옳을까? 결론부터 말하자. 그 말은 너그럽게 보아준다고 해도 절반만 맞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외부 환경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를 받는 ‘꼭두각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다. 자유의지란 한마디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다. 예를 들면 어떤 범행을 저지른 사람이 같은 상황에서 그 범행을 저지르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바로 이 자유의지 때문에 인간은 매 순간마다 스스로의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다른 동물들과 구분되는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생생한 증언이 있다. 비엔나 정신요법 제3학파의 창시자이자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이기도 한 빅터 프랭클 박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그의 책에 이렇게 쓰고 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활의 체험을 통해서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자신의 행동에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강제수용소에서 살았던 우리들 막사 앞을 지나가던 죄수가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던진다든지, 그들에게 마지막 남은 빵 조각까지도 주고 가던 광경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다.…곧 한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주어진 어떠한 환경에 놓이더라도 자기의 태도를 선택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김용규/자유저술가, 〈도덕을 위한 철학통조림〉 저자
김용규/자유저술가, 〈도덕을 위한 철학통조림〉 저자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알렉산더 박사의 말처럼 사회적 환경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이 그토록 강력하다면, 우리는 부단히 힘을 모아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사회적 억압이 적은, 더욱 건전한 사회로 만들어가야만 한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행위를 사회의 탓으로만 돌리는 태도부터 먼저 버려야 하지 않을까? “최종적인 분석을 해 보면 죄수가 어떤 종류의 인간이 되느냐는 것은 그 자신의 내적 결심의 결과이지, 수용소 생활에서 받은 영향만으로 이루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라는 프랭클 박사의 말을 되새기며, 한번 생각해 보자! 김용규/자유저술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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