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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조그만 아이들의 큰 배려가 사랑스럽다

등록 2007-04-29 16:01

주순영/삼척 진주초등학교 교사
주순영/삼척 진주초등학교 교사
선생님이 말하는 교실 안팎

수학 시간, 각도기로 각을 재는 공부를 했다. 자로 길이를 재고 각을 재면서 만들어진 도형이 어떤 모양이 되는지 그려보고 검사를 맡으라고 했다. 다한 아이들이 하나둘 검사를 맡고, 못한 사람은 집에서 해 보라고 한 뒤, 점심을 먹고 하교시켰다. 급식을 정리하거나 청소하는 아이들만 남은 가운데 두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늦은 결혼 끝에 낳은 귀한 아이지만 또래 아이들과 견줘 어눌하고 행동이 늦어 부모님의 염려와 관심 속에 있는 여자 아이, 유라. 그 아이가 집에 가지 않고 책상에 앉아 수학책을 놓고 끙끙대며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듯했다. 그 아이 앞에서 주의깊은 표정으로 서 있는 남자 아이, 동제. 다들 갔는데 둘이 왜 저러고 있지? 그런데 열려 있는 교실 문 밖에 한 낯선 여자애가 서 있다. 내가 그 아이에게 “너 뭐하니?” 묻자, “동제 기다려요”라고 한다. “동제야, 얘가 너 기다리는데?” “어, 지혜야, 오늘 먼저 가.” 어제 동제 일기에, 학원에서 같이 공부하고 지혜네 집에 가서 놀다가 변기통에 비누를 빠뜨렸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애가 바로 그 지혜구나.

그러지 않아도 동제가 같이 놀았다는 그 아이가 궁금하던 차였다. 교실에선 남녀 아이들이 함께 지내지만, 놀 때는 함께 하는 일이 드물고, 학교 밖에 나가면 그런 일은 더욱더 드물다. 그런데 동제는 여자 아이와 길에서 만나 같이 놀고 집에까지 가서 놀다 온 것이다. 평소 동제가 남자 아이들과 주로 놀았기 때문에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먼지가 날리고 청소기가 돌아가는 시끄러운 교실에 두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다. 동제가 유라에게 각도 재는 법을 조근조근 일러준다. 유라는 그 말에 귀기울여 이렇게 저렇게 해 본다. 아이들이 청소를 마치고 모두 돌아갈 무렵 두 아이가 내게 왔다. “선생님, 유라 다 풀었어요.” 동제가 유라가 해결한 문제를 내밀었다. “어, 그래? 동제가 도와준 거야?” “예. 유라가 어떻게 하는지 물어봤어요.”

그랬구나. 3월에 처음 만났을 때 유라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말 없이 있는 때가 많았다. 마음이 많이 쓰였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유라는 옆짝과 이야기도 하고 음악 시간엔 흥에 겨워 웃음을 머금은 채 몸을 들썩이기도 하고 모둠의 남자 아이가 놀린다며 내게 와서 이르기도 했다. 그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그러나 둘레에 동무들은 많지 않았다. 모둠 아이들이 그나마 유라와 관계 맺는 아이들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유라가 먼저, 집에 가서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해결해도 될 것을 동무에게 손 내밀어 나 모른다고,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동제는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동무가 있는데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머물며 끝까지 유라와 함께 있었던 것이다.

위대한 교육자이자 철학자였던 아누슈 코르착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을 대할 때 나는 두 가지 감정을 느낍니다. 지금의 모습에 대한 사랑과 앞으로의 모습에 대한 존경입니다.” 무수한 감정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순진한 듯 꾀를 부리고 겸손한 듯 고집스러운 노련한 이 아이들은 교실에서 날마다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갖고 있는 현재의 아름다운 모습은 너무나 사랑스럽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만 자라서 무엇이 될지 모르기에 이 아이들에게 끊임없는 믿음과 존경을 보내야 하는 까닭도 마땅히 여기에 있다.


주순영/삼척 정라초등학교 교사 wnejej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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