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의 거꾸로 공부법
이범의 거꾸로 공부법/
나는 학부모 대상 강연을 할 때면 꼭 강연 끝 무렵에 질의·응답 시간을 가진다. 이럴 때면 꼭 나지막하게 손을 올리고서는 쭈뼛쭈뼛하며 일어서 작은 목소리로 질문하는 분들이 있다. 그리고는 모기만한 소리로 말하기를 “선생님, 우리 애는 영 공부에 의욕도, 소질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해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만감이 교차한다. 남들이 뻔히 보고 있는 자리에서 이런 질문을 하다니, 참으로 용기 있는 부모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첫째, 이런 이야기를 학교 선생님과 나누지 못하고 나에게 물어보게 되는 현실이 답답하다. 둘째, 자녀가 공부 못하는 것이 마치 죄진 일이라도 되는 양 왜 어색한 표정으로 주변 눈치를 볼까?
나는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론에 수긍한다. 지식기반경제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미래 사회에서는 어떤 일을 하게 되든간에, 지식을 익히고 정리하고 창조하는 기능을 필요로 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누구나 공부를 다 잘할 수는 없다. 공부도 일종의 ‘특기’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할 수는 있지만 모두가 피아노를 잘 칠 수는 없는 것처럼, 공부도 모두가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결코 부끄러워하지 말자. 우리가 피아노에 재능이 없다고 해서 부끄러워하지는 않는 것처럼. 자녀가 공부에 의욕과 소질이 없다고 생각될 때에는, 과감하게 전략을 바꿔야 한다. 이런 학생이 국·영·수를 중심으로 전과목에 고루 투자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어차피 그런 전략으로 공부에 재능 있는 학생들을 따라잡아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냉정하게 ‘도대체 공부를 통해 뭘 건질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내가 보기에 가장 건져볼 만한 기능은 발표(프레젠테이션) 기능이다. ‘말하기’와 ‘쓰기’가 결합된 발표는, 정보를 검색하고 정리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직조하는 행위를 수반한다. 이 기능은 익혀두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건간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다.
교육 선진국에서는 일상적인 수업 진행이 ‘발표’와 결합되어 있다. 뭔가를 읽고 써오는 과제를 일상적으로 주고, 교사들은 종종 수업시간에 이에 근거한 토론을 유도한다. 심지어 1년에 한두 번씩 각자 관심 있는 주제를 조사한 뒤 파워포인트 화면을 넘기며 발표하는 행사를 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지식을 가공하고 직조하고 유통하는 활동을 일상적으로 경험한 학생들은, ‘정답이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은 질문’에 강하다. 반면 우리나라 학생들은 정답을 찾아내는 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지만, 막상 대학원에서 연구논문을 써야 하거나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검토해야 할 때에는 버벅거린다.
공부에 재능이 없는 학생들에게 고한다. 너희들에게는 수학 문제를 한 문제 더 풀거나 영어 단어를 한 개 더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탐구 과제와 작문·발표 과제, 수행평가에 최우선으로 투자하라. 이게 어떤 면에서는 정답 맞히기 공부보다 더 선진적인 고급 교육이다. 그리고 비록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하더라도, 이런 공부를 통해 얻어진 발표 능력은 언젠가 너희들에게 요긴하게 쓰일 것이다. 왜냐하면 너희들이 살아갈 세계는 ‘정답이 미리 준비되어 있지 않은 질문’으로 가득 찬 세계이기 때문이다.
곰TV·EBS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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