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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작은 철학자’ 키우는 인문학의 힘

등록 2008-11-09 17:29수정 2008-11-09 17:30

광주 ‘청소년 인문학 북카페’에 모이는 청소년들에게 인문학은 ‘행복’을 일깨우는 힘이다. 사진은 지난 1일 북카페에서 열린 ‘저자와의 만남’에서 강의하는 황광우씨 모습.
광주 ‘청소년 인문학 북카페’에 모이는 청소년들에게 인문학은 ‘행복’을 일깨우는 힘이다. 사진은 지난 1일 북카페에서 열린 ‘저자와의 만남’에서 강의하는 황광우씨 모습.
광주 ‘청소년 북카페’를 가다
엄마들이 만들어준 중학생 아이들 공간
강사들과 함께 ‘마음속 물음표’ 풀어가
아이들도 “몰랐던 나 알게 돼 행복해요”
“저는 노자씨 사상이 마음에 드는데요, 그런데 지금처럼 경쟁이 치열한 때에 그의 사상을 따라 살면 뒤처지고 도태될 것 같아요. 현대사회에서 노자씨, 아니 노자님 말씀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열변을 토했던 <철학콘서트>의 저자 황광우(50)씨의 말문이 막힌다. 책에서 소개한 10명의 동서양 사상가들 가운데 노자에 ‘꽂힌’ 조국화(18)양의 질문이다. 10평 남짓한 마루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30명의 눈이 황씨한테 쏠린다. “제일 힘든 질문을 했네. 철학과 삶의 관계에 대해 얘기해 보는 자리를 다음에 만드는 게 좋겠다.” 질문에 대한 해답은 미뤄졌지만 아쉬워하는 이는 없다. 오늘 듣지 못한 얘기는 다음에 들으면 된다. 이들은 그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다. 매주 토요일, 이들은 ‘청소년 인문학 북카페’에 모인다.

광주 ‘청소년 북카페’를 가다
광주 ‘청소년 북카페’를 가다
광주시 궁동 예술의 거리 한쪽에 자리 잡은 ‘청소년 인문학 북카페’는 엄마들이 만든 공간이다. 참교육을 위한 전국 학부모회 광주지부 회원들이 주축이 됐다. 이영선(45)씨는 “초등학교 때는 애들을 지역아동센터에서 하는 공부방에라도 보냈는데 중학생이 되고 나니까 보낼 데가 없더라”며 “학원 말고는 우리 아이들이 쉴 곳도, 놀 곳도 없는 현실을 보면서 우리가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회원들과 입을 맞추고 힘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 2007년 가을이다. ‘아름다운 재단’의 후원금도 받았다.

공간을 만들되 인문학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엄마들은 분주했다. 청소년 인문학의 발원지, 부산의 인디고서원 답사는 당연한 일이었다. 일찍이 다양한 철학 교육을 시도하고 있는 전남대 철학교육사업단의 김상봉 교수한테도 자문했다. 엄마들의 결론은 모든 아이들을 위한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최은순(44)씨는 “최근의 흐름을 보면 인문학을 하는 청소년은 공부를 잘하거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이 좋은 경우가 많다”며 “인문학이 소통과 대화가 단절된 시대에 희망이 되려면 접근이 좀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북카페 첫 손님들로 지역의 공부방을 졸업한 중학교 신입생을 ‘모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운영위원회를 꾸리면서 지역에 있는 인권운동단체와 환경운동단체 활동가와 함께한 것도 다양한 인문학의 가능성을 담아내자는 목적이었다.

첫 수업은 지난 3월22일에 있었다. 전남대 철학교육사업단 연구원과 공교육 교사들이 아이들을 위해 ‘인문학 강의 봉사’에 나섰다. 논술 학원 강사 하정호씨도 동참했다. 그는 공부방에서 논술 봉사를 하다 엄마들의 ‘더듬이’에 잡혔다. 하정호씨는 봄에는 <호모에티쿠스>(김상봉, 한길사)로, 가을에는 <피노키오의 철학>(창작과비평사) 시리즈로 아이들 안에 있는 물음표을 끄집어내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상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여요. 어른들이 대통령을 욕하면 그냥 그대로 따라 하고 칭찬해도 마찬가지죠.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버린 가치를 반성하고 회의하도록 끊임없이 물어줘야 해요.”

문답식 수업은 아이들의 수동적인 학교생활을 바꾸고 있다. 장영은(16)양은 “학교의 기념우표를 학생들한테 의무적으로 사도록 하는 걸 보고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학생들한테 강제하는 것은 ‘갈취’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아 선생님한테 질문한 적이 있다”며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규칙도 납득이 안 가는 게 생기고 질문을 자꾸만 하게 된다”고 말했다. 저희들끼리 소모임도 만들었다. 도덕 교과서를 비틀어 보는 ‘비꼬밍’(비꼼ing)이라는 모임이다. 네댓명이 모여 시작했는데 최근에는 프랑스의 사회 교과서를 보며 우리 실정에 맞는 대안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인문학이 ‘반골 기질’만 키우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엄마들은 손사래를 친다. “비꼬밍을 하던 중학생이 있었는데 교과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던 아이였어요. 그런데 비꼬밍을 같이 하는 형이나 누나를 보면서 교과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하데요. 그 아이는 지금 북카페 대신 학원을 열심히 다니고 있답니다.” 이야기를 전하는 윤민자(39)씨가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북카페 활동이 배움에 대한 자발적인 호기심을 키웠다는 뿌듯함이 묻어난다.

고등부 독서토론 모임이 읽은 책
고등부 독서토론 모임이 읽은 책
아이들은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게 행복할 뿐이다. 오은경(16)양은 “북카페에 와서 책을 읽고 토론을 하다 보면 내가 변화하는 게 느껴져서 정말 행복하다”며 “똑같은 환경, 똑같은 수업 스타일이 반복되는 학교에서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라고 말했다. 정다솔(15)양은 “처음에는 논술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시작했는데 날이 갈수록 논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아’라는 것을 알겠다”며 “책을 많이 읽으니까 내 생각을 명확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고 내적인 자신감도 생겼다”고 말했다.


북카페의 앞날이 녹록지는 않다. 당장 겨울이 걱정이다. 전통찻집에서 진행하다 건물 2층에 있는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난방시설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희는 저희가 커지는 것보다 저희 같은 데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그게 욕심이라면 욕심이죠.” 지자체의 지원을 받을 욕심이 없냐고 물었더니 다른 이의 몫으로 돌린다. 푸른 어둠이 깔린 예술의 거리에 인문학의 향기가 나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글·사진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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