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 전쟁은 사람들이 정말로 있었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 증거를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진은 영화 ‘트로이’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말 논술
<함께하는 교육>이 ‘통합논술교과서’와 ‘유형별 논술교과서’ 시리즈에 이어 ‘과목별 논술교과서’ 시리즈를 연재한다. ‘주제별 접근’과 ‘유형별 접근’에 이은 ‘교과목별 접근’이라고 할 수 있는 이번 시리즈는 ‘논술의 기본 교재는 교과서’라는 전제 아래 학교 현장에서 교과 담당 교사와 학생들이 교과서를 통해 논술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자는 뜻에서 마련됐다. 대입 논술고사들에서 교과 지문의 발췌 빈도가 늘어난 추세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교과에 대한 심화학습 효과도 생겨 수능 대비 학습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과목별 논술교과서 / 1. 국사 교과서로 논술 접근하기
논점 1. 역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난이도 수준-중2~고1]
■ 교과서 읽기
1. 역사의 의미
역사라는 말은 사람에 따라 다양한 뜻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조사되어 기록된 과거’라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다. 즉, 역사는 ‘사실로서의 역사’(history as past)와 ‘기록으로서의 역사’(history as historiography)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전자가 객관적 의미의 역사라면, 후자는 주관적 의미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객관적 사실, 즉 시간적으로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어났던 모든 과거 사건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는 바닷가의 모래알같이 수많은 과거 사건들의 집합체가 된다.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이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역사가의 가치관과 같은 주관적 요소가 개입하게 되며, 이 경우 역사라는 말은 기록된 자료 또는 역사서와 같은 의미가 된다. 우리가 역사를 배운다고 할 때, 이것은 역사가들이 선정하여 연구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2. 역사 학습의 목적 우리는 역사 속의 인물과 사건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역사를 배움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현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나온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지금 서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찾지 못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삶의 지혜를 습득할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며 과거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듯이, 역사를 배움으로써 현재 우리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다. 셋째, 우리는 역사를 배움으로써 역사적 사고력과 비판력을 기를 수 있다. 역사 학습은 역사적 사실의 외면에 대한 파악에서 시작하여 역사적 사실의 내면의 이해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역사적 사건의 보이지 않는 원인과 의도, 목적을 추론하는 역사적 사고력이 길러지게 된다. -고등학교 <국사>
■ 교과 심화 역사(歷史)의 정의 인간 및 인간이 속하는 자연의 모든 현상에서 과거에 일어난 사실이나, 그 사실에 관한 기술(記述). 중국에서는 주대(周代)에 주요한 사건을 죽간(竹簡) 등에 기록하는 관리를 사관(史官)이라 했다. 서양에서는 히스토리(history)라는 말이 연구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스토리아(istoria)에서 유래했듯이 과거에 관한 탐구와 그 서술을 의미한다. 동시에 독일어의 게시히테(Geschichte)의 어원인 geschehen(일어나다)처럼 일어난 사실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은 모두 그 대상이 되지만 그 모든 사실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관심, 가치 판단에 입각해 선택된 과거의 사실이 역사를 구성한다. ‘역사는 다시 쓸 수 있다’와 같은 말이 있듯이 문제의식의 차이에 따라 선택된 과거의 사실이나 그 기술이 달라진다. -출처:브리태니커
랑케(Ranke, Leopold von) 독일의 역사가(1795~1886). 엄밀한 사료 비판에 기초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 기술과 세계사적 관점의 종합적 파악을 통한 역사 연구로 근대 실증적 역사학을 수립하였다. 저서로 <세계사> 9권과 <로마 및 게르만 제 민족의 역사> 등이 있다.
‘지금까지의 역사 연구는 과거를 심판하고 동시대인들에게 미래의 행복을 교시하는 임무를 수행해 왔다. 그러나 현재의 역사 연구는 그 같은 고상한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며, 단지 실제 본래 있었던 그대로의 것을 보여 줄뿐이다.’
카(Carr, Edward Hallet) 영국의 정치학자·역사가(1892~1982). 국제관계와 국제정치사를 연구했으며 특히 마르크스, 바쿠닌 등의 전기와 같은 사상사의 저술로 유명하다. 저서에 <위기의 20년>, <평화의 조건>, <러시아 혁명사> 등이 있다.
‘역사가와 사실과의 관계는 평등의 관계이고 서로 주고 받는 관계라고 말한다. 역사가란 자기의 해석에 따라 사실을 형성하고 자기의 사실에 해석을 형성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매달려 있다. 양자 중의 어느 한쪽만을 우위에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해석이나 사실의 선택 및 정리는 다같이 쌍방의 상호작용을 통하여 미묘한 변화를 겪게 된다. 역사가는 현재의 한 부분이고 사실이라는 것은 과거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의 상호 작용이 포함되어 있다. 즉,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관련 도서
랑케 & 카, <역사의 진실을 찾아서>(지식인마을, 2007)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랑케는 정확하고 객관적인 기록을 탐구해 역사의 진실을 밝히려 했지만 그의 이런 실증사관은 역사가의 주관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여기서 바로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대화’라는 카의 역사의식이 시작된다. 과거의 사실을 강조하는 입장과 역사가의 입장을 강조하는 두 주장을 대화의 장으로 불러오자는 것이 바로 카의 생각이었다. 다양한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살펴보며 우리에게 역사가 갖는 의미를 생각해본다.
■ 논제 해결 다음 제시문 (가), (나)가 공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시오.(고려대 기출 변형) <제시문> (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괴테가 원래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괴테라는 천재적인 작가의 정신의 행로를 따라가며 그의 삶과 문학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제 괴테가 처했던 상황에서 그의 글을 읽는다. 이렇게 독자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저자의 의도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예술 작품을 대하는 옳은 태도이다. 그렇지 않다면 각자의 입장에 따른 주관적 왜곡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우리의 삶과 무관한 저자의 의도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물을 수 있다. 우리는 현대인으로서 나름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다. 모든 고전은 시대마다 고유의 관점에서 재해석되며, 거기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다. 해석은 자유로운 창조이다. 지금 우리의 삶에 아무런 의미를 보태지 못하는 저자의 원래 의도는 죽은 사실에 불과하다. (나) 트로이 전쟁의 기이한 점은 사람들이 그 전쟁이 정말로 있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없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은 없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나온 이래 수천 년이 흘렀건만 오늘날까지 그가 묘사한 전쟁이 일어났었다는 증거를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전쟁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은 단지 희망일 뿐이다. 한때 트로이가 실제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적어도 9개의 트로이가 (오늘날의 터키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왕 헬레네, 거대한 트로이 목마, 그리고 파리스가 쏜 화살에 발꿈치를 맞고 죽어간 영웅 아킬레우스가 등장하는,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의 전쟁이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마도 그리스인과 트로이인 사이에 한두 번의 싸움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도 사람이니까. 그리고 트로이인이 도시 외곽에 거대한 성벽을 쌓은 데도 무언가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1만여 명이나 되었다는 엄청난 그리스 군대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군대가 트로이의 성벽 밖에서 줄곧 진을 치고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어쨌든 호메로스의 이야기들 중 많은 부분이 실제로 있었을 것 같지가 않다. 전쟁이 10년간 계속되었다는 것부터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군대의 규율이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가 없다.(당시의 어떤 전쟁도 몇 달 이상 지속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 병사들이 왕과 함께 10년 동안이나 줄곧 해안에서 야영을 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헬레네와 관련된 이야기, 즉 헬레네가 트로이 왕자인 파리스와 눈이 맞아 달아나서, 그리스인이 그녀를 되찾아 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얘기는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비현실적이다. 세계사의 권위자인 피츠로이 래글란이 말하기를 역사상 어떤 여왕도 외국의 왕자 또는 그 밖의 누구하고 눈이 맞아 달아났던 예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 해결 방향 일본의 교과서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근현대사 교과서 논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두고 관점의 차이에 따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가 생겨난다. 그것은 ‘역사’를 보는 관점 차이 때문이다. 과거 사실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냐, 아니면 역사가가 새롭게 재구성한 해석이냐에 따라 다르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事實)들을 역사가의 주관에 따라 선택적으로 기록하면서 사실(事實)의 왜곡이 가능하다. 역사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법과 관점에 대한 이해는 각종 사회현상이나 문학 작품의 감상 등에서 직면하게 되는 해석의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문학을 감상하는 데 작가의 의도 파악을 중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독자의 주관적 이해를 강조하는 입장도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해석의 태도가 합당한지를 근거와 함께 제시하면서 서술해 나간다. ⊙ 자료 검색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Von) 독일 최대의 문호인 괴테는 25살(1774년)에 <괴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베츨러 고등법원의 실습원을 시작으로 약 10여년간 관리 생활을 한 후 스위스, 나폴리,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로마에서 <이피게니에>, <에그몬트> 등을 완성했다. 귀국 후 궁정극장 감독, 국무상 일을 보면서 <빌헬름 마이스터>, <시와 진실> 및 희곡 <파우스트>와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 등을 출간했으며 실러와 함께 독일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뤘다. 호메로스(Homer) 기원전 9세기 또는 8세기경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 서사시(敍事詩: 영웅적 업적을 찬양하고 역사적·국가적·종교적·전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주제를 고상한 문체로 다룬 이야기체의 장시로 영어로는 epic)의 걸작 <일리아스 Iliad> <오디세이아 Odyssey>의 저자로 추정된다. 그리스인들이 이 두 편의 서사시에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을 결부했다는 사실 말고는, 그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추측이 나왔다. 예를 들어 독일의 비평가 겸 문헌학자는 이 두 편의 서사시가 원래는 모든 민족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문화적 소산이라고 주장했고, 새뮤얼 버틀러(1835~1902)는 <오디세이아>의 저자가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의 시인이 있었고, 그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형성에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는 것만은 있음직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관점 넓히기 우리말 땅이름이 영토주권 지킨다 땅이름과 나라땅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것이 일본 ‘가라후토’(사할린), ‘지시마’와 우리 ‘독도·사이섬·이어도’가 있다. 19세기 중엽까지 일본에서 사할린을 에조(홋카이도)의 북쪽에 있다고 ‘북에조’라고 불렀는데, 헤이룽강을 통해 대륙문화가 발달했다. 비단을 ‘가라니시키’, 구슬을 ‘가라후토다마’라고 했다. 그래서 홋카이도 사람들이 북에조를 ‘가라후토시마’라고 했다. 일본에서 ‘가라’는 “한국·당·외국”이란 뜻이고, ‘후토’는 ‘히토’(사람)의 옛말이고, ‘시마’는 ‘섬’이다. 1875년 8월 러시아는 일본과의 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에서 “지시마(千島)는 일본말이니까 일본 영토로 하고, 가라후토시마는 일본말이 아니니까 러시아 영토로 한다”고 했다. 일본에 이런 쓰라린 경험이 있다. 미국 국립지리원 산하 지명위원회가 ‘독도’의 표준 지명을 1977년 7월14일 ‘리앙쿠르 록스’로 하고, 미국 국방부 산하 국립지리정보국이 2007년 8월 주권 미지정 지역 개념을 신설하여 ‘독도’를 이 분류에 포함했다. 그리고 2008년 7월 국립지리정보국이 러시아의 영토인 쿠릴섬들 남단 4개 섬 이름이 일본말이라며 분쟁 지역이라 하고, 한국 지배 아래 있는 ‘독도’도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확인했다. 1849년 프랑스 배 리앙쿠르가 발견했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독도’를 ‘리앙쿠르 바위’라고 한 것을 일본이 수십년 세계를 돌면서 물밑공작을 한 결과라고들 한다. 그런데 독도(DOKDO·獨島)는 우리말이 아니다. 우리말로는 본디 ‘돌섬’이다. 남쪽 사투리로 ‘독섬’이라고 한다. 그래서 석도(石島)라고 한다. 두만강 북안 용정 개산툰진 선구촌 앞에 있는 ‘사이섬’은 넓이가 약 133만㎡, 19세기 중엽 조선사람들이 강을 건너 개간했다. 이 사이섬이 우리땅 ‘간도’의 발상지다. 사이섬 돌비 뒷면에 ‘월강곡’이 새겨져 있다. 이 돌비는 길둥그렇고 사람 키보다 높은데, 2001년 11월께 중국 쪽에서 폭파해 버렸다.(<땅이름> 제27호·2004) 동북공정의 일환이다. 우리말로 남겨 두면 주권 분쟁의 불씨가 된다는 것일 게다. 간도(間島)는 우리가 ‘사이섬’을 그렇게 적은 것이다. - 정재도 한말글연구회 회장, <한겨레> 2008년 12월14일치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역사가가 이를 조사하고 연구하여 주관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역사가의 가치관과 같은 주관적 요소가 개입하게 되며, 이 경우 역사라는 말은 기록된 자료 또는 역사서와 같은 의미가 된다. 우리가 역사를 배운다고 할 때, 이것은 역사가들이 선정하여 연구한 기록으로서의 역사를 배우는 것이다. 2. 역사 학습의 목적 우리는 역사 속의 인물과 사건을 통하여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우리는 역사를 배움으로써 과거의 사실을 토대로 현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지나온 과거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지금 서 있는 자신의 참모습을 찾지 못하게 된다. 둘째, 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삶의 지혜를 습득할 수 있다. 현재는 과거의 연속이며 과거 없는 현재란 있을 수 없듯이, 역사를 배움으로써 현재 우리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다. 셋째, 우리는 역사를 배움으로써 역사적 사고력과 비판력을 기를 수 있다. 역사 학습은 역사적 사실의 외면에 대한 파악에서 시작하여 역사적 사실의 내면의 이해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역사적 사건의 보이지 않는 원인과 의도, 목적을 추론하는 역사적 사고력이 길러지게 된다. -고등학교 <국사>
■ 교과 심화 역사(歷史)의 정의 인간 및 인간이 속하는 자연의 모든 현상에서 과거에 일어난 사실이나, 그 사실에 관한 기술(記述). 중국에서는 주대(周代)에 주요한 사건을 죽간(竹簡) 등에 기록하는 관리를 사관(史官)이라 했다. 서양에서는 히스토리(history)라는 말이 연구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스토리아(istoria)에서 유래했듯이 과거에 관한 탐구와 그 서술을 의미한다. 동시에 독일어의 게시히테(Geschichte)의 어원인 geschehen(일어나다)처럼 일어난 사실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은 모두 그 대상이 되지만 그 모든 사실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관심, 가치 판단에 입각해 선택된 과거의 사실이 역사를 구성한다. ‘역사는 다시 쓸 수 있다’와 같은 말이 있듯이 문제의식의 차이에 따라 선택된 과거의 사실이나 그 기술이 달라진다. -출처:브리태니커
■ 논제 해결 다음 제시문 (가), (나)가 공통적으로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서술하시오.(고려대 기출 변형) <제시문> (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으며 괴테가 원래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괴테라는 천재적인 작가의 정신의 행로를 따라가며 그의 삶과 문학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제 괴테가 처했던 상황에서 그의 글을 읽는다. 이렇게 독자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저자의 의도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예술 작품을 대하는 옳은 태도이다. 그렇지 않다면 각자의 입장에 따른 주관적 왜곡을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다른 시각에서 보면, 우리의 삶과 무관한 저자의 의도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물을 수 있다. 우리는 현대인으로서 나름의 관점과 기준을 가지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는다. 모든 고전은 시대마다 고유의 관점에서 재해석되며, 거기에 새로운 의미가 더해진다. 해석은 자유로운 창조이다. 지금 우리의 삶에 아무런 의미를 보태지 못하는 저자의 원래 의도는 죽은 사실에 불과하다. (나) 트로이 전쟁의 기이한 점은 사람들이 그 전쟁이 정말로 있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트로이 전쟁은 없었다. 적어도 우리가 알고 있는 트로이 전쟁은 없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나온 이래 수천 년이 흘렀건만 오늘날까지 그가 묘사한 전쟁이 일어났었다는 증거를 찾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전쟁을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은 단지 희망일 뿐이다. 한때 트로이가 실제로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로 볼 때, 적어도 9개의 트로이가 (오늘날의 터키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 같다. 그러나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왕 헬레네, 거대한 트로이 목마, 그리고 파리스가 쏜 화살에 발꿈치를 맞고 죽어간 영웅 아킬레우스가 등장하는,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의 전쟁이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아마도 그리스인과 트로이인 사이에 한두 번의 싸움은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도 사람이니까. 그리고 트로이인이 도시 외곽에 거대한 성벽을 쌓은 데도 무언가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11만여 명이나 되었다는 엄청난 그리스 군대는 말할 것도 없고, 어떤 군대가 트로이의 성벽 밖에서 줄곧 진을 치고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어쨌든 호메로스의 이야기들 중 많은 부분이 실제로 있었을 것 같지가 않다. 전쟁이 10년간 계속되었다는 것부터가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군대의 규율이 그렇게 오랫동안 유지될 수가 없다.(당시의 어떤 전쟁도 몇 달 이상 지속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 병사들이 왕과 함께 10년 동안이나 줄곧 해안에서 야영을 했다는 것을 누가 믿겠는가? 헬레네와 관련된 이야기, 즉 헬레네가 트로이 왕자인 파리스와 눈이 맞아 달아나서, 그리스인이 그녀를 되찾아 오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는 얘기는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비현실적이다. 세계사의 권위자인 피츠로이 래글란이 말하기를 역사상 어떤 여왕도 외국의 왕자 또는 그 밖의 누구하고 눈이 맞아 달아났던 예가 전혀 없었다고 한다. ⊙ 해결 방향 일본의 교과서 왜곡, 중국의 동북공정, 근현대사 교과서 논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지금도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두고 관점의 차이에 따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가 생겨난다. 그것은 ‘역사’를 보는 관점 차이 때문이다. 과거 사실에 대한 객관적 기록이냐, 아니면 역사가가 새롭게 재구성한 해석이냐에 따라 다르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역사가가 역사적 사실(事實)들을 역사가의 주관에 따라 선택적으로 기록하면서 사실(事實)의 왜곡이 가능하다. 역사에 대한 다양한 접근방법과 관점에 대한 이해는 각종 사회현상이나 문학 작품의 감상 등에서 직면하게 되는 해석의 문제에도 적용할 수 있다. 즉, 문학을 감상하는 데 작가의 의도 파악을 중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독자의 주관적 이해를 강조하는 입장도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해석의 태도가 합당한지를 근거와 함께 제시하면서 서술해 나간다. ⊙ 자료 검색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Von) 독일 최대의 문호인 괴테는 25살(1774년)에 <괴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베츨러 고등법원의 실습원을 시작으로 약 10여년간 관리 생활을 한 후 스위스, 나폴리,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로마에서 <이피게니에>, <에그몬트> 등을 완성했다. 귀국 후 궁정극장 감독, 국무상 일을 보면서 <빌헬름 마이스터>, <시와 진실> 및 희곡 <파우스트>와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 등을 출간했으며 실러와 함께 독일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뤘다. 호메로스(Homer) 기원전 9세기 또는 8세기경에 활동한 고대 그리스의 시인. 서사시(敍事詩: 영웅적 업적을 찬양하고 역사적·국가적·종교적·전설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주제를 고상한 문체로 다룬 이야기체의 장시로 영어로는 epic)의 걸작 <일리아스 Iliad> <오디세이아 Odyssey>의 저자로 추정된다. 그리스인들이 이 두 편의 서사시에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을 결부했다는 사실 말고는, 그에 대해 알려진 게 거의 없다. 그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추측이 나왔다. 예를 들어 독일의 비평가 겸 문헌학자는 이 두 편의 서사시가 원래는 모든 민족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나는 일종의 문화적 소산이라고 주장했고, 새뮤얼 버틀러(1835~1902)는 <오디세이아>의 저자가 여성이라고 주장했다. 호메로스라는 이름의 시인이 있었고, 그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형성에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는 것만은 있음직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관점 넓히기 우리말 땅이름이 영토주권 지킨다 땅이름과 나라땅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것이 일본 ‘가라후토’(사할린), ‘지시마’와 우리 ‘독도·사이섬·이어도’가 있다. 19세기 중엽까지 일본에서 사할린을 에조(홋카이도)의 북쪽에 있다고 ‘북에조’라고 불렀는데, 헤이룽강을 통해 대륙문화가 발달했다. 비단을 ‘가라니시키’, 구슬을 ‘가라후토다마’라고 했다. 그래서 홋카이도 사람들이 북에조를 ‘가라후토시마’라고 했다. 일본에서 ‘가라’는 “한국·당·외국”이란 뜻이고, ‘후토’는 ‘히토’(사람)의 옛말이고, ‘시마’는 ‘섬’이다. 1875년 8월 러시아는 일본과의 가라후토·지시마 교환조약에서 “지시마(千島)는 일본말이니까 일본 영토로 하고, 가라후토시마는 일본말이 아니니까 러시아 영토로 한다”고 했다. 일본에 이런 쓰라린 경험이 있다. 미국 국립지리원 산하 지명위원회가 ‘독도’의 표준 지명을 1977년 7월14일 ‘리앙쿠르 록스’로 하고, 미국 국방부 산하 국립지리정보국이 2007년 8월 주권 미지정 지역 개념을 신설하여 ‘독도’를 이 분류에 포함했다. 그리고 2008년 7월 국립지리정보국이 러시아의 영토인 쿠릴섬들 남단 4개 섬 이름이 일본말이라며 분쟁 지역이라 하고, 한국 지배 아래 있는 ‘독도’도 주권 미지정 지역으로 확인했다. 1849년 프랑스 배 리앙쿠르가 발견했다고 자기들 마음대로 ‘독도’를 ‘리앙쿠르 바위’라고 한 것을 일본이 수십년 세계를 돌면서 물밑공작을 한 결과라고들 한다. 그런데 독도(DOKDO·獨島)는 우리말이 아니다. 우리말로는 본디 ‘돌섬’이다. 남쪽 사투리로 ‘독섬’이라고 한다. 그래서 석도(石島)라고 한다. 두만강 북안 용정 개산툰진 선구촌 앞에 있는 ‘사이섬’은 넓이가 약 133만㎡, 19세기 중엽 조선사람들이 강을 건너 개간했다. 이 사이섬이 우리땅 ‘간도’의 발상지다. 사이섬 돌비 뒷면에 ‘월강곡’이 새겨져 있다. 이 돌비는 길둥그렇고 사람 키보다 높은데, 2001년 11월께 중국 쪽에서 폭파해 버렸다.(<땅이름> 제27호·2004) 동북공정의 일환이다. 우리말로 남겨 두면 주권 분쟁의 불씨가 된다는 것일 게다. 간도(間島)는 우리가 ‘사이섬’을 그렇게 적은 것이다. - 정재도 한말글연구회 회장, <한겨레> 2008년 12월14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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