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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햇볕 드는 따뜻한 ‘새 땅’ 희망의 사과나무 싹트네

등록 2009-01-04 17:14

지난해 가을, 직접 심었던 고구마를 수확하는 자리에서 신이 난 사과나무 공부방 친구들이다. 2009년, ‘희망세상’으로 자리를 옮긴 식구들의 한 해 소망이 ‘동화처럼’ 이루어지길 바란다.  광진ㆍ성동 시민연대 부설 사과나무 청소년 공부방 제공
지난해 가을, 직접 심었던 고구마를 수확하는 자리에서 신이 난 사과나무 공부방 친구들이다. 2009년, ‘희망세상’으로 자리를 옮긴 식구들의 한 해 소망이 ‘동화처럼’ 이루어지길 바란다. 광진ㆍ성동 시민연대 부설 사과나무 청소년 공부방 제공
[커버스토리] ‘사과나무 공부방’ 보금자리 옮기던 날
‘희망세상 지역아동센터’로 이름 바꿔달고 넓은 곳으로
“전교 221등 안에 꼭 들거야” “서울에서 정규직 취업할래”
아이들의 꿈이 커졌습니다 선생님들도 웃음꽃 핍니다

2009년 1월 5일, 공부방으로 향하는 은지(14)의 발걸음이 날아갈 듯합니다. 새 공부방에 대한 기대 때문이지요. 은지가 다니는 광진구 사과나무 청소년 공부방(광진·성동 시민연대 부설)은 오늘 새 둥지를 틀고 처음 문을 엽니다. 이름도 달라졌어요. 희망세상 청소년 전용 지역아동센터로요. 새 공부방 구석구석을 상상하면서 걷고 있는 은지에게는 이름보다 더 중요한 변화가 많습니다. ‘지하에서 1층으로 올라가니까 창문도 있겠지? 햇볕은 얼마나 들어올까? 이제 방바닥에도 난방이 된다는데 그럼 정말 따뜻할 거야.’

“누가 보면 너 이상한 애인 줄 알겠어. 뭐가 좋아서 그렇게 웃어?” 언제 나타났는지 민호(14)가 팔을 툭툭 치며 장난스럽게 묻습니다. 사실 민호는 ‘공부방 이전 반대론자’ 였습니다. 집에서 다니기에는 옛날 공부방이 거리도 가깝고 훨씬 편하거든요. 옛날 공부방과 정도 많이 들었어요. 낮밤 없이 어두컴컴하고 계절 없이 서늘한 지하 공부방이었지만 밥도 먹고 공부도 하고 방석 던지기 싸움도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중학생 열아홉, 상근 선생님 셋, 자원봉사자 형누나가 열댓명 …. 마흔 명의 공부방 식구 가운데 누가 옛날 공부방을 그리워할까. 갑자기 민호는 옛날 공부방한테 미안해집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둘의 목을 끌어안습니다. 윤혜경(43) 원장 선생님입니다. “늬들 웬일로 이렇게 일찍 출발했어? 새 공부방이 궁금한 모양이구나? 그런데 민호는 기분이 안 좋아 보인다?” “아빠가 중학교 2학년 때 전교 221등 안에 들어야 용돈 8천원으로 올려 준대요. 442명 가운에 절반만 하라는 건데 그게 쉽나요. 공부할 생각 하니 막막해서 그래요.”

민호는 그냥 둘러댄 말이지만 원장 선생님은 민호한테 뚜렷한 새해 계획이 생긴 것이 기쁩니다. 새 공부방으로 이사하면서 아이들의 공부욕심을 채워줄 수 있게 된 것도 꿈만 같습니다. “뭐가 막막해. 새 공부방에는 방이 세 개나 있어서 문을 닫으면 조용하게 공부할 수 있어.” 방 세 곳을 자율학습실, 공부하기 싫을 때 쉴 수 있는 곳, 수업전용교실 등으로 나눠 학습 분위기를 만들기로 원장 선생님은 같이 일하는 상근 선생님들과 이미 의논을 마쳤습니다.

“무슨 얘기를 이렇게 심각하게 하세요?” 이번에는 창준(16)이가 원장 선생님과 민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옵니다. 창준이는 2006년 3월, 사과나무 공부방이 처음 뿌리를 내린 순간부터 함께한 ‘원년 멤버’입니다. 창준이는 이제 곧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과나무 공부방도 졸업합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싶다고? 야, 야, 그럼 우선 공부방 수업시간에 떠들지 말고 집중해. 자원봉사자 선생님하고 만날 놀려고만 하지 말고.” 후배들이 새해에는 좀더 의젓해지기를 바라는 공부방 ‘장남’의 점잖은 소망입니다. 은지와 민호는 ‘잘난 척한다’며 삐죽거리지만 원장 선생님은 마음이 터질 것처럼 뿌듯합니다.

“오, 창준이가 내 새해 소원을 제대로 알고 있구나!” 어느새 나타난 김상호(27) 선생님이 창준이와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은지, 민호도 원장 선생님을 버리고 금세 상호 선생님 옆으로 와 장난을 칩니다. 지금으로부터 딱 1년 전, 처음 만난 아이들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사회봉사 학점만 채우면 작별인사도 없이 사라지는 대학생에 대한 불신과 경계의 벽이 두꺼웠던 게지요. 요즘 부쩍 자기를 열렬히 반겨주는 아이들을 보며 상호 선생님은 생각합니다. ‘그래, 너희에겐 수학보다, 영어보다, 사랑과 관심이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아이들의 바깥 나들이에 꼭 동행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니 고구마를 심고 캐는 농장체험 일정이 벌써 궁금해집니다.


드디어 저 멀리 새 공부방이 보입니다. 이제 횡단보도만 건너면 됩니다. 파란불을 기다리고 있는데 혜진(15)이와 오송인(25) 선생님을 만납니다. “선생님! 혜진이한테 꿈이 생겼대요!” 원장 선생님을 보자마자 송인 선생님이 소리칩니다. 식구들 눈이 혜진이한테 쏠리자 혜진이가 수줍게 말을 꺼냅니다. “인서울 해서 정규직 취업하는 꿈요.”

원장 선생님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습니다. 현실이 녹록지 않다는 것은 아이들이 먼저 압니다. 전공보다 대학을 먼저 정하고 꿈보다 직업을 우선하는 요즘입니다. ‘혜진아, 새 공부방에서는 네가 정말 좋아하는 게 뭔지, 널 가슴 뛰게 하는 게 뭔지 함께 찾아보자꾸나.’ 진로상담과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이 하나 더 생겼습니다.

그래도 송인 선생님은 혜진이가 목표를 정했다는 사실에 신이 난 모양입니다. 아이들의 꿈에 물과 거름을 줘야 한다는 기분 좋은 책임감이 생깁니다. “올해는 꼭 아이들 데리고 대학 캠퍼스 탐방을 해야겠어요. 강의실도 가보고 학생식당에서 밥도 먹고요. 아이들한테 동기 부여가 될 것 같아요!”

횡단보도를 건너자 새 공부방을 향한 일곱 명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집니다. 100미터, 50미터, 10미터 …. 이제 희망세상이 된 공부방을 향해 아이들이 뛰기 시작합니다. 창준이가 문을 열어젖힙니다. “와 …!” 사과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렸던 사과들의 2009년 희망세상은 그렇게 열렸습니다.

그곳에는 이제 곧 각자 다른 재능과 꿈을 지닌 열아홉명의 아이들이 살 겁니다. 호텔경영학과를 나왔지만 아이들과 부대끼며 사느라 교육학에 대한 관심이 다시 생겨버린 안정숙(30) 선생님, 급식도우미로 사과나무와 인연을 맺었다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 아동복지교사로 정식 발령을 받은 오재순(42) 선생님은 아이들의 ‘비빌 언덕’이 돼 줄 겁니다. 근처의 세종대는 이기적이고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아이들을 좋아하는 자원봉사자 선생님을 끊임없이 공급해 줄 것이며 광진구와 성동구의 시민들은 어렵고 궂은일이 있을 때마다 발 벗고 나서 줄 겁니다. 그렇게 온 마을이 희망세상에 사는 아이들을 함께 키울 겁니다.

(지난해 12월29일 사과나무 청소년 공부방 식구들을 취재한 결과를 바탕으로 공부방이 다시 문을 여는 5일을 가상해 재구성했습니다.)

진명선 기자 edu@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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