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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교육

조선말 외세에 맞선 쇄국정책의 명암

등록 2009-04-05 17:01

조선말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펴며 사대교린 질서를 지키려 했지만, 충분한 준비 없이 문호를 개방해야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조선 주재 각국 외교관들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조선말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펴며 사대교린 질서를 지키려 했지만, 충분한 준비 없이 문호를 개방해야만 하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조선 주재 각국 외교관들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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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별 논술교과서 / [난이도 수준-중2~고1]

논점 1. 쇄국정책
■ 교과서 읽기

통상 수교의 거부

서양 세력이 조선에 몰려오던 시기에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고,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였다. 이와 같은 흥선대원군의 외세 배척 정책은 천주교의 탄압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하 생략)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와 미국 함대의 연속적인 침공을 격퇴한 후 외세 배격 정책을 더욱 강화하고, 서울 종로 거리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척화비의 내용

“서양 오랑캐가 침범했을 때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를 자손만대에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비문을 짓고 신미년에 비석을 세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我萬年子孫 丙寅作辛未立)

위정척사 운동

문호 개방 이후 외세가 침투해 오고, 정부의 개화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면서, 이에 반대하는 보수 유생층의 위정척사 운동이 강력하게 전개되었다. (중략)

1860년대의 위정척사 운동은 서양의 통상 요구에 대응하여 서양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통상 반대론을 내세웠다. 이어서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응하는 척화 주전론을 내세워,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강력하게 뒷받침해 주었다. 그리고 문호 개방을 전후한 1870년대에는 유생들이 왜양 일체론과 개항 불가론을 들어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인 최익현은 개항에 반대하는 이유로 일본의 침략에 의한 국가 자주성의 손상, 일본과의 교역에 의한 산업의 피폐, 천주교의 확산에 의한 미풍양속의 파괴 등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다.

-고등학교 <근현대사>(두산)


■ 교과 심화

쇄국정책(鎖國政策)

조선시대 외국과의 통상을 제한하여 교류 관계를 맺지 않았던 외교정책.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외국과 활발한 교역을 맺었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중국과 일본 두 나라만의 사대교린 정책을 시행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천주교가 유입되고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문호 개방을 요구해 오자 더욱 완강하게 쇄국정책을 폈다. 19세기 전반에 이미 산업혁명을 완료하고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영국·프랑스·미국·독일 등 서구 열강은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구하려 군함을 앞세우고 아시아 각국에 문호 개방을 강요해 왔다. 우선 영국이 1842년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과 강제적인 통상 관계를 맺고 이어 1860년에 영국-프랑스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여 굴욕적인 베이징조약을 맺었다.

이즈음 조선에도 이양선(異樣船)이 자주 출몰하여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권을 잡은 대원군은 밖으로 쇄국정책을 더욱 철저히 하여 외국과의 교역을 엄금하는 한편 안으로는 천주교도들을 외세를 끌어들이는 앞잡이로 간주하여 가혹한 탄압을 가해 1866년(고종 3년) 병인사옥(丙寅邪獄)을 일으켰다. 이때 조선인 천주교도들뿐 아니라 프랑스인 신부 9명도 처형함에 따라 프랑스 함대가 내침함으로써 병인양요가 일어났다. 이어 1871년에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베이징에 있던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군함 5척을 끌고 침략하여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대원군은 2차례의 양요를 성공적으로 물리침으로써 외세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전국에 “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평하자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화평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이다”라는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쇄국의 결의를 더욱 굳게 다졌다. 이와 같은 쇄국정책은 당시의 세계정세 변화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한편 일본은 마침 조선에서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틈을 타 1875년 운요호 사건을 도발하여 1876년에 강제로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했다. 이로써 쇄국정책은 종지부를 찍고 조선은 아무런 준비 없이 문호를 개방, 세계 자본주의 열강 앞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브리태니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흥선대원군 이하응
흥선대원군 이하응
흥선대원군 이하응(사진)은 1820년 영조의 고손자인 남연군 이구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운 이하응은 1843년(헌종 9년) 흥선군에 봉해졌다. 이하응은 왕족이었지만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하게 지냈다. 그 당시 똑똑한 왕족을 죽이기까지 하는 안동 김씨들의 권세로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이하응은 불량배와 어울리며 거지처럼 구걸 행세까지 해 안동 김씨들의 감시에서 벗어났다.

이하응은 당시 임금이었던 철종에게 아들이 없자, 대왕대비인 신정왕후 조씨(익종의 비)와 만나 둘째아들인 명복(고종)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1863년 철종이 죽고 신정왕후 조씨에 의해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이하응은 대원군이 되었다.

어린 고종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린 대원군은 먼저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당파를 초월해 인재를 뽑았다. 부패한 관리들을 몰아냈고,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당쟁의 원인이 되는 많은 서원을 없애 버렸다. 이어 <육전조례>, <대전회통> 등을 펴내 법률제도를 세워 나라의 기강을 세웠다. 관리와 백성들의 사치와 낭비를 막고 양반과 상민의 구별 없이 세금을 거둬들였다. 대원군은 왕실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경복궁을 고쳐 지었다. 그리고 서양 강대국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철저히 막았다. 쇄국정책을 폈던 것이다.


■ 논제 해결

서양인의 눈으로 본 한국과 한국인

다음 제시문들은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양인이 한국과 한국인에 관해 쓴 글이다. 제시문 (가)에서 드러난 조선에 대한 필자의 인식을 지적하고 (나)의 논의와 연관 지어 바람직한 한국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논술하시오.(600~700자, 경희대 논술 변형)

(가) 조선인은 물건을 훔치고 거짓말하고 속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을 지나치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남에게 해를 끼치고도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잘한 일이라고 여긴다. 한편 조선인은 착하고 남의 말을 곧이듣기 잘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어떤 것이나 믿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낯선 사람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특히 승려들에 대하여 그러하다. 그들은 여자처럼 나약하다. 아주 오랜 옛날에 일본인들이 쳐들어와 조선의 왕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고 파괴했다는 것을 믿을 만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는 우리에게 청나라가 얼음강(압록강)을 건너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적과 싸워 죽은 병사보다 산으로 도망가서 목매달아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조선인들은 자살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으며 어쩔 수 없어 그랬다는 식으로 오히려 동정한다. 조선인은 피를 보기 싫어한다. 누군가가 전투에서 쓰러지면 곧 달아나고 만다.

(나) 일반적으로 한국인은 본래가 선량하고, 협조적이며, 손님을 후대하고, 부모와 자식에 대해 자상하고, 지적이며, 탁월한 언어 자질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250년간의 실정(失政)이 한국인을 게으르고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는 줄곧 사회정의가 부재했다. 탐욕스런 관리는 연약한 정부의 감독 소홀을 틈타서 양민들이 애써 얻은 것을 착취했다. 관리 계급인 양반 밑에 굴종하는 것과 관습에 대한 완강한 집착은, 이것이 쇄국의 필연적 귀결이었던 것과 같이, 유교의 폐해이다.

한국 남자들의 나태한 기질은 노력 없이 돈을 벌자는 태도와 통한다. 단시간에 번 돈을 절제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일로 탕진한다. 현재에도 사회 전반에 팽배한 가부장 제도와 매우 원시적인 귀신 숭배는 가족의 운명을 책임진 가장의 모든 행동을 통제한다. 모든 정신적 자세가 원초적 순진함(우매함) 속에 경직되어 있다. 서양 문물을 가까이 접한 한국인들조차 그들의 단점과 그 타파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독자적인 문화의 가치에 대한 지나친 자부심이 개선책을 모색하는 일을 어렵게 한다. 가장 호의적으로 한국인을 평가하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헐버트(Hulbert)는 한국인의 다양한 속성에 미친 불교의 영향을 간파하였다. 그는 신비주의, 운명 결정론, 비관주의, 정적주의(靜寂主義) 등 네 가지 종교적 기반을 한국인 속에서 발견하였다. 천년에 걸친 불교의 오랜 지배와 억압받은 역사적 운명 속에서 응결된 민족성이 현재의 이러한 정신적 자세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헐버트는 한국인이 중국의 합리주의와 일본의 이상주의의 아주 적절한 조화를 지니고 있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사실은 한국인이 점차 현재의 정체 상태로부터 탈피할 희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 해결 방향

제시문 (가)는 표류로 인한 피해 보상을 받으려고 조선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헨드리크 하멜의 ‘조선국에 대한 기술’(1668)에서 발췌한 것이다. 여기에서 제시하는 한국인의 이기적 성향, 타인을 쉽게 믿는 속성, 그리고 자살을 쉽게 하는 나약함 등은 현대의 우리 사회에서도 존재한다. 지역 이기주의, 사기 범죄율 급증, 높은 자살률 등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나)는 1930년대에 한국을 방문하고 한국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방대하고 해박한 기록을 남긴 독일 지리학자 헤르만 라우텐자흐의 ‘코레아’(1942)에서 인용한 것이다. 제시문에서 지적한 조선 유교 사회의 실정과 가부장 제도, 원시 신앙 등이 한국인을 나태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는 점은 현대에 이르러 여성의 권리 강화, 호주제 폐지, 종교의 사회적 역할 강화 등의 노력으로 점차 폐해가 완화되고 있다.

논제에서는 과거 한국에 대해 긍정적 혹은 부정적 시각을 현재 처지에서 분석하고 종합적으로 평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특히 제시문 (가)에서는 일부 조선인에 대한 경험과 경험담 등을 토대로 전체 조선인을 폄하하고 있다. 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한다.

이런 편협한 인식이 나오게 된 배경은 역사적으로 쇄국 정책이나 유교 사상 등 폐쇄적 대외 정책의 영향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화 시대 한국인의 정체성은 이를 극복하면서 고유의 장점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서술돼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반론적인 개념 나열보다 제시문과 연계된 내용을 서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자료 검색

하멜 표류기 (하멜 저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인 하멜 일행이 1653년(효종 4년) 8월 16일 제주도에 표착해 1666년(현종 7년) 9월 일본으로 탈출하기까지 13년 동안 조선에서의 생활과 견문을 기록한 책. <난선제주도난파기>라고도 한다. 하멜은 포수 출신 선원으로 이 배의 서기였다. 하멜 일행은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가던 도중 폭풍우를 만나 36명이 제주도에 난파했는데 이후 서울로 압송됐다. 조선은 이들의 표류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해 살도록 했다. 1655년 이들은 청나라 사신의 행렬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고 구원을 호소했으나 실패했으며, 이 일로 하멜 일행은 서울에서 추방되어 전라도 병영으로 이속됐다.

1666년 생존자 16명 중 8명이 그동안 사귀어 온 한 조선인한테서 배를 구입해 일본으로 탈출했다. 이들로부터 조선에 잔류자가 있음을 알게 된 네덜란드의 요청으로 2년 후에 남은 일행도 일본으로 송환되었다. 처음과 끝 부분이 자세하다. 중간에 조선의 군사·형제(刑制)·관료제·가옥·교육·산물·상업 등에 관한 간단한 기술이 있으며, 맨 마지막에 조선으로 가는 항로가 기술되어 있다. 한국을 서방에 소개한 최초의 책으로 유명하며 유럽 각국어로 번역되었다. -브리태니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선교사

호머 헐버트(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는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에서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884년 다트머스(Dartmouth) 대학을 졸업하고, 유니언신학교 재학중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했다. 그는 1886년 9월 23일 개원한 육영공원의 운영과 교육 내용 및 방법에 관한 규정으로 ‘육영공원 설학절목’(育英公院 設學節目)을 제정했다. 학생들이 세계 지리에 관심을 보이자 1889년에는 <토민필지>(士民必知)를 한글판으로 발행했다. 1891년 12월 교사직을 그만두고 잠깐 귀국했다가 1893년 9월 감리회 선교사로 다시 내한했다.

1901년 <코리아 리뷰>를 창간하고, 미국 감리회 운영의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문서 선교에 힘썼다. 그는 교육 선구자로서 23년간(1886~1909) 봉직하면서 한국의 문화, 역사 등 각 분야에서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에 알린 열정적 선교사였다. 1903년 3월 7일 와이엠시에이(YMCA) 설립자문위원회에서 위원장과 1903년 10월 18일 창립총회(황성기독교청년회) 때에는 의장으로 회의를 진행했다.

1905년 10월 한국의 외교권과 재정권이 박탈되고 일본의 한국 병합이 구체화되자 고종 황제의 밀사로 워싱턴에 파견되어, ‘한미수호조약’에 따라 도움을 요청하는 친서를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려 했으나 일본의 한국 지배를 묵인하는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으로 면담은 실패했다. 또한 1907년 4월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네덜란드 헤이그(Hague) 만국평화회의 파견 밀사로 활동했다. 이 같은 그의 적극적 정치·외교 참여를 일본 정부가 못마땅하게 여겨 1908년 미국 정부의 소환 형식으로 한국을 강제로 떠나야 했다. 그 후 선교사직을 은퇴하고 매사추세츠주 스프링필드에 지내다가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초청으로 다시 내한했다. 그러나 86세 고령에다 여러 날의 여독(旅毒)으로 1949년 8월 5일 서울 위생병원에서 별세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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