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안광복 교사의 인문학 올드 앤 뉴 /
[난이도 수준-고2~고3] 1. 애정 어린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낫다?
2. 엣지, 된장녀, 그리고 과시적 소비- 자본주의는 무엇을 먹고 사는가
3. 강철군화와 올리브나무 - 우리에겐 너무 꿈같은 자유주의입니다 세계 명품의 20%는 일본 안에서 팔린다. 또한 30%는 해외여행을 하는 일본인들이 산다. 명품 시장의 절반을 일본이 좌지우지하는 셈이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명품 사랑’도 일본 못지않다. 명품은 원래 유럽의 귀족과 부자들을 위한 상품에서 출발했다. 예컨대, 루이뷔통은 귀족들의 여행 가방을 만들던 장인(匠人)이었고, 에르메스는 말안장을 만들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정작 ‘명품의 고향’인 유럽에서는 사치품이 별 관심을 못 끈다. 왜 그럴까? <럭셔리>는 그 이유를 명쾌하게 풀어주는 책이다. <뉴스위크> 기자 출신인 저자 데이나 토마스는 명품의 역사와 의미를 조목조목 짚어낸다. 유럽의 귀족들은 오랜 세월 동안 사회의 인정을 받아왔다. 나아가 많은 이들은 큰 성(城)과 너른 영지(領地)까지 갖고 있다. 따라서 굳이 자기가 ‘고귀한 신분’임을 거들먹거릴 필요가 없다. 그러지 않아도 확연하게 드러나는 까닭이다. 반면, 땅값 비싼 일본에서는 넓은 저택과 거대한 부동산으로 넉넉함을 자랑하기란 아주 어렵다. 게다가 일본은 국민의 85%가 자신은 중산층이라고 여기는 나라이기도 하다. 평등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의 뛰어남을 증명하려고 조바심을 낸다. 이런 욕심을 채워주는 데는 명품이 제격이다. 눈에 확 띄는 값비싼 옷과 구두는 내가 특별하고 부유한 사람임을 분명하게 보여줄 테다. 그런데 명품으로 뽐내고 싶은 욕망에는 기묘한 데가 있다. 명품 숍에서도 수천달러씩 하는 옷이 팔리는 경우는 드물다. 명품 가게들은 자잘한 지갑이나 핸드백에서 대부분의 수입을 올린다고 한다. 사실, 작은 명품 핸드백 하나쯤은 부자가 아니더라도 조금 무리하면 누구나 살 수 있다.
붐비는 지하철 안에서도 명품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가방들이 넘쳐 난다. 과연 명품을 멘 그네들이 부티 나고 ‘엣지’ 있게 보이는가? 된장녀, 된장남들은 이상한 족속이 아니다. 어느덧 우리 사회에는 명품에 대한 강박 비슷한 것이 생겼다. 사람들은 이제 특별하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명품을 몸에 두른다. 명품을 만드는 회사도 마찬가지다. 원래 명품은 장인들이 손으로 하나하나 만들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팔 수 있는 상품을 몇 개 만들지 못했다. 따라서 아무나 살 수도 없었다. 장인들은 자신의 손님으로 손색없는 품위와 재력을 갖춘 사람에게만 물건을 팔았다. 하지만 가문과 전통이 맥을 못 추는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는 반바지와 샌들 차림으로도 최고의 명품 숍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간다. 여기서 명품은 돈만 있다면 아무나 살 수 있는 ‘비싼 상품’일 뿐이다. 게다가 더 이상 명품은 장인들의 손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낼 뿐이다. 단가를 낮추려고 중국이나 베트남에서 만들어지는 명품도 흔하다. 우리에게도 낯선 풍경인 ‘명품 아웃렛’은 매우 이상한 가게다. 자신의 부유함과 특별함을 자랑하기 위해 ‘떨이 상품’을 구입한다? 명품과 아웃렛은 아주 안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버젓이 영업을 하며 큰 이익을 남긴다. 도대체 명품 같지 않아진 명품에 사람들이 절절매는 까닭은 무엇일까? 1899년에 나온 베블런(Thorstein Veblen, 1857~1929)의 <유한계급론>에는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이 담겨 있다.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라는 말로 유명한 학자다. 권력과 재산을 가진 이들은 남들보다 여유가 많다. 여가 시간과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힘 있는 사람일 테다. 가진 사람들은 돈과 시간을 충분하게 낭비함으로써 넉넉한 생활을 자랑하려 한다. 과시적 소비란 이렇듯 낭비하는 습관을 일컫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낭비는 필수적이기까지 하다. 우리 사회가 생필품만 만들고 쓴다면 어떨까? 당장 거리에 나앉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닐 터다. 공장을 돌리고 이익을 남기려면 뭔가는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소비되어야 한다. 우리가 사서 쓰고 버리는 많은 상품들은 사실 없어도 되는 것들이다. 물론, 인간에게는 낭비를 싫어하는 본성이 있다. 이를 베블런은 ‘제작 본능’(workmanship instinct)이라 부른다.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생산적’이라는 가면을 씌운 낭비에 매달리곤 한다. 와인에 대한 깊은 조예를 쌓기 위한 노력, 골프 연습, 피아노 연주 등이 과연 생산적인 일이라 할 수 있을까? 이를 통해 우리는 꼭 삶에 필요한 것들을 손에 넣는가? 우리는 값지게 낭비하는 데 시간과 돈을 기꺼이 바치고 있을 뿐이다. 문제는 사치가 필수처럼 되어버린다는 데 있다. 유행 지난 옷이 창피해서 밖으로 나가기 주저될 때를 생각해 보면 이 말의 의미가 금방 다가온다. 심지어 사람들은 ‘꼭 필요한 사치’를 위해 차라리 식비를 아끼는 쪽을 택하기까지 한다. 과시적 소비는 결코 줄어드는 법이 없다. 삶의 기준은 나날이 올라가는 탓이다. 우리가 꿈꾸는 ‘인간다운 삶’ 속에는 얼마나 많은 낭비가 숨어 있는지 곰곰이 따져보라. 지금의 우리는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럼에도 마음은 항상 가난하고 생활에 쪼들리는 느낌이다. 베블런은 과시적 소비가 출산율까지 떨어뜨린다고 경고했다. 우리 사회를 보면 그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기죽지 않게만 애를 키우는 데도 부모의 허리는 휘청거린다. 교육과 육아 비용 탓에 아이 갖기를 포기하는 이들이 좀 많은가. 왜 우리는 단순하고 소박하게 살지 못할까? 소크라테스는 “사치는 만들어진 빈곤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명품을 좇는 된장남, 된장녀들은 우리 마음을 신산스럽게 한다. 그러나 그들을 탓할 일이 아니다.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자체가 신기루를 좇는 ‘된장문명’ 아니던가. 중동고 철학교사, 철학박사 timas@joong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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