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을 벙어리로 만든 지배계급 위주 역사 서술은 깨진 지 오래다. 지난해 열린 촛불집회는 역사의 중심이 목소리를 내는 민중에게, 행동하는 민중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우리말 논술 36. 근현대사 교과서로 논술 접근하기
과목별 논술교과서 / [난이도 수준-중2~고1]
논점 1. 민중의 삶을 강조하는 역사 서술
교과서 읽기
단발령 관련 에피소드
친일 대신들의 종용으로 어쩔 수 없이 단발을 하게 된 고종은 1895년 11월15일에 백성들에게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 조칙을 내렸다. 그러나 유생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도 단발령에 반대하여 많은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학부대신 이도재는 단발령에 반대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유림의 지도자 최익현은 “내 머리는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고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또, 경상도 안동에서는 아들이 상투를 자르자 아버지가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한편 단발령이 실시되면서 사진관들은 때 아닌 호황을 맞았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체를 훼손당하기 전에 온전한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보전하겠다는 사람들이 사진관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개항 이후의 식생활
19세기 중엽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은 하루에 세 끼,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개월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었다고 한다. 개화기에도 남쪽 지방의 주식은 기본적으로 쌀밥이었으나 여기에 보리나 잡곡을 섞어 먹기도 하였으며, 북쪽 지방의 주식은 조밥이었으나 부유한 사람들은 쌀밥을 먹었다. 그러나 쌀의 수출이 많아지면서 쌀값이 폭등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겨울철에는 쌀밥, 여름철에는 밀, 조, 수수밥을 먹었다고 한다. 밥, 국과 함께 우리나라 식단에 없어서는 안 되는 부식이 김치였다. 김치는 소금, 초, 장 등에 절인 채소 곧 담근 채소를 의미한다. 조선 후기부터 고추 재배가 성행하면서 김치를 담그는 데 고추를 많이 이용하였다. 18세기 말에는 배추에 젓갈과 고춧가루를 넣어 담근 배추김치가 등장하였고, 20세기에는 배추김치가 무김치를 대신하여 부식의 중심이 되었다. (중략) 한편 문호 개방 이후 외국인들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외국의 음식 문화가 전래되었다. 먼저 궁중과 개화 지식인 사이에 서양의 식품과 요리법 그리고 식생활의 관습이 전파되었다. 1890년대에는 궁중에서 커피와 홍차를 마셨으며 양식의 전래와 함께 양과자도 전해졌다. 한편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인들과 많은 상인들이 들어와 호떡집이 생겼고, 그 후 중국 음식점이 많아지면서 중국 음식이 많이 보급되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많이 왕래하면서 일본 음식도 들어왔다. 이처럼 개화기에는 외국의 음식이 전래되어 우리나라의 음식 문화가 점차 한식과 외래식의 혼합 시대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근현대사>, 두산
교과 심화 인간의 주체적 행위를 강조하는 역사 관점의 특징 오로지 힘센 사람만이 역사를 만들고 일반 민중은 자연과 사회에 묶인 채 말 못하는 벙어리로 천시되는 역사학의 관행은 서서히 깨어지고 있었지만, 사회사의 등장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행동이 사회적 구조에 의하여 결정되는 수동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아래에서 역사를 만든다”는 맑스의 말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아무리 사회구조의 영향이 크다 해도 역사적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행동이며, 이는 몇몇 영웅적 개인만이 아닌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략) 언뜻 생각하면 이러한 새로운 역사학적 관점이 사회사적 관점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위를 통해 그 사회적 구조를 알아내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주체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관점은 일단 사회적 구조의 실체보다는 사회의 역사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사가 가지는 운명론적 결론이 아닌 역동적인 역사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회사는 구조를 파악하여 관점을 고정시킴으로써 개개인의 행동이 가진 다양성을 보지 못하고 역사에서 제외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지만, 이 새로운 역사학은 개인의 행동 변화를 통해 사회적 구조의 패턴을 짐작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다양성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초암논술아카데미, <단단하게 당당하게>, 숨비소리
논제 해결 사건이 아닌 실생활 중심 서술 다음 제시문 (가)의 기록은 (나)의 주장이 제시된 시기에 해당한다. 제시문 (가), (나)를 참고하여 민중의 삶이 중심을 이루는 역사 서술이 지니는 가치에 대하여 논술하시오.(1000자 안팎) (가) 삼정의 문란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졌다. 전정, 군정, 환곡 등 삼정은 당시 국가 재정의 기본을 이루었다. 그런데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전정의 경우에는 대장에 없는 토지와 황폐한 토지에도 세금을 거두었으며, 병역 대상자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군정의 경우에는 어린아이와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거두었다. 빈민 구제를 위해 정부가 곡식을 대여하는 환곡의 경우에는, 허위 문서의 작성과 고리대 형식의 운영 등을 통하여 관리들이 착복함으로써 백성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을 좀먹었다. 한편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나 사회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국정의 혼란과 관리들의 수탈 행위, 이에 따른 민생의 파탄은 하층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순조 때에 일어난 홍경래 난을 비롯하여, 철종 때에는 민란의 시대라 불릴 만큼 진주, 개령, 공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민중의 항쟁이 일어나 사회의 동요가 극심하였다. -고등학교 <근현대사>, 두산 (나) 이들은 모두 전하의 적자입니다. 이들은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에 살며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이 가난하기 그지없고 의지할 데 없는 무리들로서 ‘이렇게 사는 것은 죽은 목숨이나 같다’라고 생각하고 서로 모여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향품(鄕品: 각 지역의 중정관이 관할 지역 내의 여론을 살펴 덕망 있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을 상상(上上)부터 하하(下下)까지의 9품(品)으로 분류한 것)은 여기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사족(士族: 문벌이 좋은 집안이나 그 자손, 또는 선비의 집안이나 그 자손)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이서(吏胥: 관아의 말단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구실아치인데 고려 시대에는 중앙의 각 관아에 속한 말단 행정 요원만을 가리켰으나, 조선 시대에는 경향(京鄕)의 모든 이직(吏職) 관리를 뜻했음)도 참가하지 않았으며, 평민 가운데 형편이 좋은 사람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모여 이러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모두가 유민, 떠돌이, 들짐장수, 머슴과 같은 무리들입니다. 이와 함께 혹 한두 명, 이 세상에서는 다시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역도들이 이들의 울분을 이용하고자 그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의 가슴속에 쌓인 원한을 풀 뿐입니다. (…)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난리를 일으키지 않고, 반드시 못사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땅에 붙어사는 사람들입니다. 못사는 사람은 떠도는 자들입니다. (…) 오직 이 떠도는 사람들은 살아가는 데 의지할 만한 것이 없어, 낮이나 밤이나 원망하며 난리를 생각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의리를 가지고 타이른다 하여도 좇지 않습니다. (…) 현재 국가의 전세법은 상등의 토지에는 12두를 거두고 하등의 토지에는 겨우 4두만 거둡니다. 그리고 관동지방의 양전하지 않은 군읍에서는 수령들이 사사로이 1결의 토지에 대해 다른 군읍의 10결에 해당하는 세금을 거두지만 백성들은 원망하지 않으니, 이 어찌 정상입니까. 이 때문에 다른 명목의 세금은 모두 토지에 부과하여 백성들은 한층 궁핍해집니다. 마땅히 일정한 법을 정하여 그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신은 조정에서 먼저 1/10세를 정하여 조선 초와 마찬가지로 쌀 30두를 거두고 토지에 부과하는 규정 외의 세금은 모두 없애기를 바랍니다. (…) 이와 같이 할 경우 토지 겸병의 폐해는 자연 사라질 것이며, 농업에 힘쓰는 자가 많아질 것입니다. -이종범·최원규 편, <자료 한국근현대사 입문>, 혜안 해결 방향 제시문 (가)는 1860년 전후의 역사 서술이다. 19세기 전반기의 조선 사회는 국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함에 따라 외척들이 정치를 좌우했다. 외척들의 세도 정치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국가 기강이 문란해졌다. 관직의 매매가 성행하고 백성에 대한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해졌다. 이에 따른 삼정의 문란은 일반 민중의 삶을 궁핍하게 만들었으며, 민란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제시문 (나)는 (가)와 동시대인 1862년 민란의 대책으로서 강위(姜瑋)의 고환당수초(古歡堂收草) 권4에 수록된 글이다. 농민 항쟁의 원인을 농민층의 분화에서 비롯된 지주와 전호 간의 대립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농민 항쟁은 삼정제도의 개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는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견해이다. 이 글을 통해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는지, 왜 민란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등 당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 서술은 권력을 지배했던 계층이나 시대적 영웅에 의한 사회 구조의 변화가 중심을 이뤘다. 이에 비해 민중의 삶이 중심을 이루는 역사 서술은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사건이 아닌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역사 서술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먼저, 문화와 실생활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높이고, 문화를 인류학적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하층계급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객관적 서술에 집착했던 과거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주체적인 행동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주목한다. 따라서 역사의 외부에 있던 다양한 민중의 삶을 재현하고 있다. 특히 마법과 마녀, 저항과 폭력, 육체와 성생활, 종교와 신앙, 주거생활과 가족, 문자와 매체, 여성과 남성 등 일상의 모습에 대한 추적과 연구 등에 관심을 둔다. 자료 검색 삼정의 문란 삼정의 문란이란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 제도)이 문란해졌음을 말한다. ① 전정의 문란: 임진왜란의 참화로 말미암아 더욱 심해졌다. 전란으로 많은 땅이 황폐해진데다가 궁방전·둔전 등 면세지와 양반·토호가 조작한 은결(隱結: 대장에 오르지 않은 땅)의 증가는 국고 수입을 격감시켜, 결과적으로는 무력한 농민의 부담만 과중하게 만들었다. 농민은 땅 1결(結)에 전세 4말을 내고, 그에 더하여 삼수미 2말 2되, 대동미 12말, 결작(結作) 2말을 내야 되었는데, 그 위에 또 여러 가지 명목의 부가세와 수수료를 바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관리들은 황폐해서 못 쓰는 땅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심지어는 백지징세라 하여 공지(空地)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도 있었다. ② 군정의 문란: 군정은 장정이 직접 병역을 치르는 대신 군포를 내던 것을 말하는데, 영조가 이를 반감하여 장정 1명에 포(布) 1필로 정하고 어염세·선박세·은결의 결전(結錢) 등으로 부족액을 보충하기로 하는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원래 양반·아전·관노는 병역이 면제된데다가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도 세력가에게 매달려 군역을 기피하는 반면에 무력한 농민을 대상으로 황구첨정·백골징포 등의 협잡이 성행하여 전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받았다. ③ 환정의 문란: 환곡은 본래 가난한 농민에게 정부의 미곡을 꾸어 주었다가 추수기에 이식(利息)을 붙여 회수하는 것으로, 빈민의 구제가 목적이었던 것이 후기에는 고리대인 ‘장리’로 변하여 그 폐단이 삼정 가운데서 가장 심하였다. -위키 백과 관점 넓히기 의미 없는 삶은 없다 일전에 한 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을 만난 일이 있다. 학생들은 대체로 3, 40대 연령대였는데 지도교수 말로는 6, 70대 학생들도 재학중이라고 한다. 노년의 학생들은 작가가 되려고 문예창작을 배우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서 꼭 쓰고 싶은 얘기가 있어 글쓰기를 배운다고 했다. 자영업을 한다는 60대 학생은 월남전 참전 경험이 삶을 너무 많이 변화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하고 싶다고 한다. 캐나다에 거주한다는 학생은 이민 1세대로서 캐나다 이민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고, 기업의 관리자라는 학생은 중동 건설현장에 파견되었던 첫 세대로서 그 경험을 기록하고 싶다는 것이다. (중략) 지난 삶을 기록하는 일은 또한 자기 정체성을 명료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전의 공동체를 잃고 삶의 전통과 단절된 현대인들은 정체성 혼돈과 ‘삶의 의미 없음’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자 로이 셰이퍼는 정체성 회복 수단으로 자기 서사 쓰기를 제안한다. 자기 이야기를 써나가는 과정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비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히 삶의 의미도 발견할 것이다. 개인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물론 사료 가치도 크다. 요즈음처럼 미시사·일상사에 대한 연구가 두드러진 시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했던 것이 보편적이요 전형적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저마다 특정 지역과 특정 상황에 매인 특정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기록하고 교환하기를 나는 바란다. 많은 기록의 종합과 검토를 통해 비로소 과거는 그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잊어버릴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유종호 <나의 해방 전후>) (중략) <나의 해방 전후>나 <침묵으로 지은 집>을 읽으면서 나는 살과 피가 흐르는 역사를 경험하고, 윗세대들을 더 깊이 이해하려 애쓰게 되었다. 해방 직후 국민학교 교실 수업 분위기는 어땠는지, 6·25 동란 때 예닐곱살짜리 여자아이 내면이 어땠는지, 그런 것들을 ‘체험 당사자만이 가지고 있고 드러낼 수 있는 진정성의 후광’을 통해 맛보았다. 윗세대들이 그들의 특별하고 아까운 삶의 기록을 더 많이 남겨 주었으면 좋겠다. 생애를 투자해 얻은 지혜와 통찰도 넓은 마음으로 건네준다면 고마울 것이다. 캐나다 이민사, 월남전 참전기, 중동 건설기 같은 책이 나온다면 꼭 한번 읽어볼 예정이다. -김형경(소설가), <한겨레> 2008년 11월29일치
19세기 중엽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2월부터 8월까지 7개월 동안은 하루에 세 끼, 9월부터 이듬해 정월까지 5개월 동안은 하루에 두 끼를 먹었다고 한다. 개화기에도 남쪽 지방의 주식은 기본적으로 쌀밥이었으나 여기에 보리나 잡곡을 섞어 먹기도 하였으며, 북쪽 지방의 주식은 조밥이었으나 부유한 사람들은 쌀밥을 먹었다. 그러나 쌀의 수출이 많아지면서 쌀값이 폭등하여 가난한 사람들은 대체로 겨울철에는 쌀밥, 여름철에는 밀, 조, 수수밥을 먹었다고 한다. 밥, 국과 함께 우리나라 식단에 없어서는 안 되는 부식이 김치였다. 김치는 소금, 초, 장 등에 절인 채소 곧 담근 채소를 의미한다. 조선 후기부터 고추 재배가 성행하면서 김치를 담그는 데 고추를 많이 이용하였다. 18세기 말에는 배추에 젓갈과 고춧가루를 넣어 담근 배추김치가 등장하였고, 20세기에는 배추김치가 무김치를 대신하여 부식의 중심이 되었다. (중략) 한편 문호 개방 이후 외국인들과의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외국의 음식 문화가 전래되었다. 먼저 궁중과 개화 지식인 사이에 서양의 식품과 요리법 그리고 식생활의 관습이 전파되었다. 1890년대에는 궁중에서 커피와 홍차를 마셨으며 양식의 전래와 함께 양과자도 전해졌다. 한편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인들과 많은 상인들이 들어와 호떡집이 생겼고, 그 후 중국 음식점이 많아지면서 중국 음식이 많이 보급되었다. 또한 일본인들이 많이 왕래하면서 일본 음식도 들어왔다. 이처럼 개화기에는 외국의 음식이 전래되어 우리나라의 음식 문화가 점차 한식과 외래식의 혼합 시대로 발전해 가게 되었다. -고등학교 <근현대사>, 두산
교과 심화 인간의 주체적 행위를 강조하는 역사 관점의 특징 오로지 힘센 사람만이 역사를 만들고 일반 민중은 자연과 사회에 묶인 채 말 못하는 벙어리로 천시되는 역사학의 관행은 서서히 깨어지고 있었지만, 사회사의 등장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행동이 사회적 구조에 의하여 결정되는 수동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 상황 속에서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 아래에서 역사를 만든다”는 맑스의 말이 갖는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아무리 사회구조의 영향이 크다 해도 역사적 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의 행동이며, 이는 몇몇 영웅적 개인만이 아닌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략) 언뜻 생각하면 이러한 새로운 역사학적 관점이 사회사적 관점과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결국 인간의 행위를 통해 그 사회적 구조를 알아내려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주체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관점은 일단 사회적 구조의 실체보다는 사회의 역사적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를 설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회사가 가지는 운명론적 결론이 아닌 역동적인 역사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회사는 구조를 파악하여 관점을 고정시킴으로써 개개인의 행동이 가진 다양성을 보지 못하고 역사에서 제외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지만, 이 새로운 역사학은 개인의 행동 변화를 통해 사회적 구조의 패턴을 짐작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삶의 다양성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초암논술아카데미, <단단하게 당당하게>, 숨비소리
논제 해결 사건이 아닌 실생활 중심 서술 다음 제시문 (가)의 기록은 (나)의 주장이 제시된 시기에 해당한다. 제시문 (가), (나)를 참고하여 민중의 삶이 중심을 이루는 역사 서술이 지니는 가치에 대하여 논술하시오.(1000자 안팎) (가) 삼정의 문란으로 국가 재정이 어려워졌다. 전정, 군정, 환곡 등 삼정은 당시 국가 재정의 기본을 이루었다. 그런데 토지에 세금을 부과하는 전정의 경우에는 대장에 없는 토지와 황폐한 토지에도 세금을 거두었으며, 병역 대상자에게 군포를 부과하는 군정의 경우에는 어린아이와 죽은 사람에게도 군포를 거두었다. 빈민 구제를 위해 정부가 곡식을 대여하는 환곡의 경우에는, 허위 문서의 작성과 고리대 형식의 운영 등을 통하여 관리들이 착복함으로써 백성을 괴롭히고 국가 재정을 좀먹었다. 한편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나 사회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세도 정치와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국정의 혼란과 관리들의 수탈 행위, 이에 따른 민생의 파탄은 하층민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순조 때에 일어난 홍경래 난을 비롯하여, 철종 때에는 민란의 시대라 불릴 만큼 진주, 개령, 공주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민중의 항쟁이 일어나 사회의 동요가 극심하였다. -고등학교 <근현대사>, 두산 (나) 이들은 모두 전하의 적자입니다. 이들은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에 살며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없이 가난하기 그지없고 의지할 데 없는 무리들로서 ‘이렇게 사는 것은 죽은 목숨이나 같다’라고 생각하고 서로 모여 이러한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향품(鄕品: 각 지역의 중정관이 관할 지역 내의 여론을 살펴 덕망 있고 재주가 뛰어난 인물을 상상(上上)부터 하하(下下)까지의 9품(品)으로 분류한 것)은 여기에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사족(士族: 문벌이 좋은 집안이나 그 자손, 또는 선비의 집안이나 그 자손)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이서(吏胥: 관아의 말단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구실아치인데 고려 시대에는 중앙의 각 관아에 속한 말단 행정 요원만을 가리켰으나, 조선 시대에는 경향(京鄕)의 모든 이직(吏職) 관리를 뜻했음)도 참가하지 않았으며, 평민 가운데 형편이 좋은 사람도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모여 이러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모두가 유민, 떠돌이, 들짐장수, 머슴과 같은 무리들입니다. 이와 함께 혹 한두 명, 이 세상에서는 다시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 역도들이 이들의 울분을 이용하고자 그 사이에 끼어들어 그들의 가슴속에 쌓인 원한을 풀 뿐입니다. (…) 형편이 나은 사람들이 난리를 일으키지 않고, 반드시 못사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땅에 붙어사는 사람들입니다. 못사는 사람은 떠도는 자들입니다. (…) 오직 이 떠도는 사람들은 살아가는 데 의지할 만한 것이 없어, 낮이나 밤이나 원망하며 난리를 생각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이들은 비록 의리를 가지고 타이른다 하여도 좇지 않습니다. (…) 현재 국가의 전세법은 상등의 토지에는 12두를 거두고 하등의 토지에는 겨우 4두만 거둡니다. 그리고 관동지방의 양전하지 않은 군읍에서는 수령들이 사사로이 1결의 토지에 대해 다른 군읍의 10결에 해당하는 세금을 거두지만 백성들은 원망하지 않으니, 이 어찌 정상입니까. 이 때문에 다른 명목의 세금은 모두 토지에 부과하여 백성들은 한층 궁핍해집니다. 마땅히 일정한 법을 정하여 그 폐단을 막아야 합니다. 신은 조정에서 먼저 1/10세를 정하여 조선 초와 마찬가지로 쌀 30두를 거두고 토지에 부과하는 규정 외의 세금은 모두 없애기를 바랍니다. (…) 이와 같이 할 경우 토지 겸병의 폐해는 자연 사라질 것이며, 농업에 힘쓰는 자가 많아질 것입니다. -이종범·최원규 편, <자료 한국근현대사 입문>, 혜안 해결 방향 제시문 (가)는 1860년 전후의 역사 서술이다. 19세기 전반기의 조선 사회는 국왕이 어린 나이에 즉위함에 따라 외척들이 정치를 좌우했다. 외척들의 세도 정치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국가 기강이 문란해졌다. 관직의 매매가 성행하고 백성에 대한 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해졌다. 이에 따른 삼정의 문란은 일반 민중의 삶을 궁핍하게 만들었으며, 민란의 주된 원인으로 작용했다. 제시문 (나)는 (가)와 동시대인 1862년 민란의 대책으로서 강위(姜瑋)의 고환당수초(古歡堂收草) 권4에 수록된 글이다. 농민 항쟁의 원인을 농민층의 분화에서 비롯된 지주와 전호 간의 대립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농민 항쟁은 삼정제도의 개혁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는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견해이다. 이 글을 통해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 있었는지, 왜 민란이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는지 등 당시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 서술은 권력을 지배했던 계층이나 시대적 영웅에 의한 사회 구조의 변화가 중심을 이뤘다. 이에 비해 민중의 삶이 중심을 이루는 역사 서술은 인간이 역사의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사건이 아닌 삶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강하다. 이런 역사 서술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먼저, 문화와 실생활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높이고, 문화를 인류학적 문화의 개념으로 이해함으로써 하층계급의 삶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객관적 서술에 집착했던 과거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주체적인 행동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주목한다. 따라서 역사의 외부에 있던 다양한 민중의 삶을 재현하고 있다. 특히 마법과 마녀, 저항과 폭력, 육체와 성생활, 종교와 신앙, 주거생활과 가족, 문자와 매체, 여성과 남성 등 일상의 모습에 대한 추적과 연구 등에 관심을 둔다. 자료 검색 삼정의 문란 삼정의 문란이란 조선시대 국가 재정의 3대 요소인 전정(田政)·군정(軍政)·환정(還政: 정부 보유 미곡의 대여 제도)이 문란해졌음을 말한다. ① 전정의 문란: 임진왜란의 참화로 말미암아 더욱 심해졌다. 전란으로 많은 땅이 황폐해진데다가 궁방전·둔전 등 면세지와 양반·토호가 조작한 은결(隱結: 대장에 오르지 않은 땅)의 증가는 국고 수입을 격감시켜, 결과적으로는 무력한 농민의 부담만 과중하게 만들었다. 농민은 땅 1결(結)에 전세 4말을 내고, 그에 더하여 삼수미 2말 2되, 대동미 12말, 결작(結作) 2말을 내야 되었는데, 그 위에 또 여러 가지 명목의 부가세와 수수료를 바쳐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관리들은 황폐해서 못 쓰는 땅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심지어는 백지징세라 하여 공지(空地)에 세금을 부과하는 일도 있었다. ② 군정의 문란: 군정은 장정이 직접 병역을 치르는 대신 군포를 내던 것을 말하는데, 영조가 이를 반감하여 장정 1명에 포(布) 1필로 정하고 어염세·선박세·은결의 결전(結錢) 등으로 부족액을 보충하기로 하는 균역법을 시행하였다. 그러나 원래 양반·아전·관노는 병역이 면제된데다가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자 일부 농민도 세력가에게 매달려 군역을 기피하는 반면에 무력한 농민을 대상으로 황구첨정·백골징포 등의 협잡이 성행하여 전보다도 더 심한 고통을 받았다. ③ 환정의 문란: 환곡은 본래 가난한 농민에게 정부의 미곡을 꾸어 주었다가 추수기에 이식(利息)을 붙여 회수하는 것으로, 빈민의 구제가 목적이었던 것이 후기에는 고리대인 ‘장리’로 변하여 그 폐단이 삼정 가운데서 가장 심하였다. -위키 백과 관점 넓히기 의미 없는 삶은 없다 일전에 한 사이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생들을 만난 일이 있다. 학생들은 대체로 3, 40대 연령대였는데 지도교수 말로는 6, 70대 학생들도 재학중이라고 한다. 노년의 학생들은 작가가 되려고 문예창작을 배우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서 꼭 쓰고 싶은 얘기가 있어 글쓰기를 배운다고 했다. 자영업을 한다는 60대 학생은 월남전 참전 경험이 삶을 너무 많이 변화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기록하고 싶다고 한다. 캐나다에 거주한다는 학생은 이민 1세대로서 캐나다 이민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싶고, 기업의 관리자라는 학생은 중동 건설현장에 파견되었던 첫 세대로서 그 경험을 기록하고 싶다는 것이다. (중략) 지난 삶을 기록하는 일은 또한 자기 정체성을 명료히 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전의 공동체를 잃고 삶의 전통과 단절된 현대인들은 정체성 혼돈과 ‘삶의 의미 없음’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정신분석학자 로이 셰이퍼는 정체성 회복 수단으로 자기 서사 쓰기를 제안한다. 자기 이야기를 써나가는 과정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비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히 삶의 의미도 발견할 것이다. 개인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물론 사료 가치도 크다. 요즈음처럼 미시사·일상사에 대한 연구가 두드러진 시기에는 더욱 그럴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했던 것이 보편적이요 전형적이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저마다 특정 지역과 특정 상황에 매인 특정 경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을 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기록하고 교환하기를 나는 바란다. 많은 기록의 종합과 검토를 통해 비로소 과거는 그 진실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잊어버릴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유종호 <나의 해방 전후>) (중략) <나의 해방 전후>나 <침묵으로 지은 집>을 읽으면서 나는 살과 피가 흐르는 역사를 경험하고, 윗세대들을 더 깊이 이해하려 애쓰게 되었다. 해방 직후 국민학교 교실 수업 분위기는 어땠는지, 6·25 동란 때 예닐곱살짜리 여자아이 내면이 어땠는지, 그런 것들을 ‘체험 당사자만이 가지고 있고 드러낼 수 있는 진정성의 후광’을 통해 맛보았다. 윗세대들이 그들의 특별하고 아까운 삶의 기록을 더 많이 남겨 주었으면 좋겠다. 생애를 투자해 얻은 지혜와 통찰도 넓은 마음으로 건네준다면 고마울 것이다. 캐나다 이민사, 월남전 참전기, 중동 건설기 같은 책이 나온다면 꼭 한번 읽어볼 예정이다. -김형경(소설가), <한겨레> 2008년 11월29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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